한반도 위기를 촉매재로 삼아 한-미 양국의 최고위층에서 벌어지는 카지노 자본주의, 국가 권력이 금융시장의 핵무기 격인 파생상품으로 '잭팟'을 노리는 거대한 음모를 담은 본격 추리 소설 '데칼코마니-신들의 화폐'를 작가의 양해를 얻어 연재한다.
☜이 소설은 한반도 위기를 모티브로 한 가상의 추리 소설이며, 등장 인명·지명·기관·사건 등은 사실과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데칼코마니 신들의 화폐 -제 14화 메마른 낙엽]에서 계속
[데칼코마니 신들의 화폐 -
제 15화 도이체방크]
2010년 11월 11일. 연인들이 무슨 데이라고 이름 붙여 초콜릿 과자를 주고받던 바로 그날이었다.
혜경은 홀로 외로움을 달래며 걷고 또 걸었다. 축 처진 어깨로 집에 도착한 그녀는 습관처럼 TV를 켰다.
순간, 앵커의 분노 섞인 목소리가 화면을 가득 메웠다.
“옵션 만기 10분 전, 외국계 금융사의 주식 매도 물량이 폭탄처럼 쏟아졌습니다. 단 몇 분 만에 시가총액 20조 원이 증발했습니다. 그들은 파생상품에서 최대 무려 2,500배의 이익을 챙겼습니다!”
혜경의 눈빛이 굳어졌다.
그것은 바로 도이체 방크, 그 주가 조작 사건이었다.
그녀는 멍하니 화면을 바라보았다.
푸른 차트의 곡선이 마치 죽어 가는 사람의 심전도처럼 꺾이며 추락하고 있었다.
화면의 서늘한 빛이 파도처럼 그녀의 얼굴을 덮쳤다.
‘단 십 분이라니…'
그녀의 입술이 떨렸다.
‘사람들의 피와 땀, 처절한 눈물이 담긴 돈. 그 돈이 단 십 분 만에 사라지는 세상이라니…’
그녀는 손끝으로 화면 속 푸른 선을 따라 천천히 그었다.그 순간, 머릿속에 하나의 생각이 떠올랐다.
‘역사를 뒤집는 건, 언제나 단 1%의 손이야.’
그녀의 눈동자가 차갑게 빛났다.
도이체방크 사건은 단순한 금융 사고가 아니었다. 그것은 세계 금융시장이 이미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왜곡되고 조종되고 있다는 결정적 증거였다.
시장은 자연스럽게 흔들리는 것이 아니었다. 누군가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시장의 흐름과 축을 비틀고 있었다. 가격을 올리고, 꺾고, 탐욕과 공포의 방향까지 계산하고 있었다.
그들의 목표물은 언제나 개미투자자들이었다.
그들에게 개미투자자들은 시장의 참여자가 아니었다. 미리 몰아넣고 털어낼 사냥감일 뿐이었다.
‘오늘은 어쩌다 그 보이지 않는 손이 모습을 드러낸 날이야.’
시장의 의심은 더 이상 소문이 아니었다.
혜경은 곧바로 노트를 펼치고 펜을 들었다.그리고 한 줄을 써 내려갔다.
‘돈이 신이 된 세상, 그 신을 심판하는 한 인간의 이야기.’
그녀의 눈빛이 순간적으로 번쩍였다.
‘그래…! 바로 이거야!’
그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오랜 시간 그녀를 짓누르던 번뇌와 고민이 한순간에 풀려나가는 듯했다.
‘그래. 평시에도 저런데, 분단과 금융이 결합하면… 바로 그거야.’
그녀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돈의 흐름은 바로 피의 흐름이야. 이 피가 한반도의 분단선을 타고 흐른다면, 그곳이 바로 역사의 반전이 시작되는 자리야.’
분단은 이제 더 이상 정치나 군사의 문제만이 아니었다.
분단이 전쟁과 금융에 묶이는 순간, 세상은 완전히 달라진다. 그것은 이익의 분기점이었다. 세상의 전환점이었다.
그리고 그 구조를 뒤집는 일은, 잘려 나간 역사의 심장을 되살리는 일이었다.
도이체방크 사건.
그것은 더 이상 사고나 사건이 아니었다.역사의 반전. 거대한 전쟁의 첫 신호였다.
‘동혁… 네가 꿈꿨던 세상, 이젠 내가 현실로 만들어 줄게.’
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그러나 그녀의 눈빛은 결코 흔들리지 않았다. 그녀의 안에서 분단과 금융, 그리고 인간의 희망이 하나의 불꽃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역사의 반전―개미의 분노》
그 시나리오가 잉태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세월은 덧없이 흘러갔다. 그녀의 부모도 외동딸인 혜경을 위해 미국 생활을 접고 귀국했다. 그리고 전 재산을 현금화해 주식투자에 나섰으나, 곧 큰 손실을 보고 있었다.
어느 날, 주식 투자자 만찬 자리. 혜경의 부친은 사회자가 소개하는 젊은 부사장의 약력에서 눈길을 멈췄다. 테이블을 돌던 부사장이 다가오자 담당 직원이 들뜬 목소리로 소개했다.
“안 사장님의 따님이 부사장님과 미국 학교 동창이랍니다.”
젊은 부사장의 눈빛이 번쩍였다.
“혹시 따님 성함이 안혜경... 아닌가요?”
“네, 맞아요. 그럼…”
“네, 어쩐지 그런 예감이 들었습니다. 아버님 얼굴에 왠지 혜경의 얼굴이 있어서요.”
담당 직원은 즉시 자리를 내어주었다. 의자를 당겨 앉은 부사장은 좀처럼 자리를 뜰 줄 몰랐다.
귀공자 같은 외모. 단정한 태도. 그리고 잔잔한 미소.
그는 오성 그룹의 외아들, 박창근이었다.
며칠 후.
궁전호텔 문 앞에서 창근은 혜경과 그녀의 부친을 반갑게 맞이했다.
“너를 다시 만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정말 반갑다.”
창근은 진심으로 그녀를 반가워했다. 혜경이 기억하는 그는 조용하고 내성적인 학생이었다. 늘 많은 친구에게 둘러싸여 있던 그녀에게, 그는 선뜻 다가오지 못했었다. 혜경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반갑다. 너랑 이렇게 만나게 되다니. 학교 다닐 때 넌 참 조용한 편이었지?”
창근이 쑥스러운 듯 웃었다.
“그랬지. 넌 언제나 우리들의 여왕이었잖아. 공부, 음악, 운동… 모든 걸 완벽히 해냈고. 모든 남학생의 짝사랑이었고.”
혜경은 과한 칭찬이 부담스러워 슬쩍 화제를 돌렸다.
“과찬이야. 그땐 말 한 번 제대로 섞어 본 적도 없으면서.”
“그땐 내가 좀 어렸지. 넌 너무 인기가 많았고… 하하.”
혜경은 장난스럽게 그를 바라보았다.
“알고 보니, 너 참 대단하더라. 재벌 집안의 귀한 외동아들. 왜 아무도 몰랐지, 그때는?”
“그때는… 아버지께서 절대 티 내지 말라고 당부하신 것도 있었고.”
혜경의 부친이 흐뭇한 얼굴로 끼어들었다.
“그래서 이 난리 통에도 끄떡없는 회사구나. 자네 부친은 정말 대단하신 분이야.”
창근은 공손히 웃으며 말했다.
“아버님께서 말씀하실 때, 저는 바로 혜경의 아버님임을 확신했습니다. 참, 직감이란 게 신기하더군요.”
부친은 식사하는 내내 흐뭇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얼마 후, 호텔 로비 앞에는 검은 리무진이 대기하고 있었다. 창근은 얼른 차 문을 열었다.
“댁까지 잘 모시고, 바로 퇴근하시게.”
기사에게 당부를 마친 그는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돌아가는 차 안에서 부친은 한마디 말도 없이 혜경의 표정을 살폈다.
그렇게 세월은 또 무심하게 속절없이 흘러갔다.
혜경은 여전히 교도소를 찾았다.
‘누군가 아직도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절망 속의 그에게는 한 줄기 희미한 빛이 될 수 있으리라.’
그런 마음으로 찾아간 그녀에게 돌아온 것은 뜻밖의 소식이었다.
동혁이 이미 출소했다고?
혜경은 그 자리에서 멍하니, 한참을 서 있었다. 그건 기쁨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슬픔이었다. 영원한 작별의 의미였기 때문이다.
오랜 세월, 암울한 절망 속에서도 간신히 버텨 온 그녀의 애절한 소망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었다.
차가운 바람이 그녀의 얼굴을 스쳤다.
‘10년이라는 세월…’
그녀의 눈가가 젖어 들었다.
‘너의 시간은 아직도 그날에 멈춰 있어…’
그녀는 털썩 주저앉았다. 입술을 깨물었지만, 참았던 눈물이 끝내 터져 나왔다.
그날 오후.
퇴근길의 창근은 서울의 야경이 내려다보이는 스카이라운지 레스토랑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들어서는 혜경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뭔지 모르게 그녀의 얼굴에는 깊은 수심이 가득했다. 창근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슨 일 있는 거야?”
혜경은 힘없이 자리에 앉았다.
“미안해. 오늘은… 그냥 취하고 싶어.”
와인잔을 기울이는 그녀의 눈빛은 깊은 수렁에 빠져 길을 잃은 듯 흔들리고 있었다.
“간절한 소망이… 이젠 또 다른 절망이 되었어. 삶의 의미도 사라졌어.”
그녀의 목소리는 검붉은 와인보다 더 짙게 떨렸다.
그때, 귀에 익은 음악이 흘러나왔다.
뮤지컬 〈Cats〉의 주제곡 〈Memory〉였다.
슬픔이 깃든 선율과 그리운 추억을 회상하는 노랫말이 그녀의 가슴을 무너뜨렸다.
한때 눈부셨던 시간이 그녀 안에서 다시 숨을 쉬었다. 기억은 사라지지 않기에, 사랑만 그대로 남았다. 그 모든 것이 노래의 선율 속에 살아 있었다.
세상은 잠든 듯 고요했고, 그녀의 기억은 그 노래처럼 빛바랜 필름 위로 되감기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남은 것은 부서진 추억의 잔해뿐이었다.
문득 그녀는 깨달았다.
사랑이란 망각이 아니라, 끝없이 되새김하는 상처라는 것을.
“저기 있네… 저기 가고 있네.”
눈물 맺힌 눈동자로, 그녀는 한남대교 위를 흘러가는 차량의 불빛들을 가리켰다.
그 불빛들은 마치 멀어져 가는 기억처럼 강 위를 따라 흘러내리고 있었다.
창근은 숨을 고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누군가 보고 싶은 거야? 혹시, 실연한 거니?”
혜경은 술잔을 움켜쥔 채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넌 좋은 친구야. 하지만… 미안해. 난 환자야.”
많이 취한 탓이었을까. 그녀는 오랫동안 가슴속에 묻어 두었던 이야기를 그날 창근에게 모두 토해 냈다.
첫사랑, 동혁.
그녀에겐 누가 그 이름만 불러도 세상이 멈췄다.
애절한 추억과 그리움. 아직도 가시지 않은 아픈 연정. 그 모든 것이 거침없이 흘러나왔다.
그녀의 목소리가 떨릴수록, 창근의 얼굴은 점점 굳어 갔다. 하지만 슬픔과 취기에 젖은 혜경은 멈추지 않았다.
희미한 웃음과 눈물 섞인 목소리로, 동혁이라는 이름을 한없이 불렀다.
붉은 와인이 끝없이 흘러내렸다. 밤은 그렇게 깊어만 갔다.
두 사람은 끝내 서로에게 기대어 쓰러졌다. 와인잔이 굴러가고, 촛불이 흔들렸다. 테이블 위에 쓰러진 두 사람을 창근의 기사와 웨이터가 조심스레 부축했다.
혜경의 머리카락이 창근의 어깨에 스쳤다.
그 순간에도 그녀는 여전히 꿈결처럼 그 이름을 속삭이고 있었다.
“동혁…”
둘을 태운 차는 도시의 네온 불빛을 가르며 천천히 혜경의 집을 향해 움직였다.
돌아가는 차 안.
불빛에 비친 창근의 얼굴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짙게 배어 있었다.
며칠 뒤, 창근은 혜경의 부친을 찾아갔다. 그리고 봉투 하나를 건넸다. 봉투를 열어 본 부친의 얼굴에 놀라움이 번졌다. 3억 원짜리 수표였다.
수표와 함께 짧은 메모가 동봉되어 있었다.
‘혜경에겐 꼭 비밀로 해 주시고, 나중에 부자가 되실 때 갚으시면 됩니다. 힘내세요!’
혜경은 그날 이후에도 틈이 날 때마다 동혁의 소식을 수소문했다.
그러던 어느 날.
전화벨이 울렸다.
그녀는 친구 지혜와 함께 동혁을 찾아 지리산으로 향했다. 수소문 끝에 겨우 찾은 동혁의 고향 집은 대나무 사립문의 형체만 간신히 남아 있었다.
강풍이 불면 그대로 날아갈 듯한 낡고 초라한 집.
마당에는 잡풀만 무성했다.
폐가였다.

두 사람의 얼굴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그들은 다시 차를 타고 비포장 산길을 돌아 나왔다. 한 민가 앞에서 차를 세웠다.
지혜가 마당에 앉아 있던 할머니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전동혁 씨 부모님이 어디 계신지 아세요?”
할머니는 담배를 입에 문 채 두 사람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내가 그 집안은 잘 알제. 다 죽어 부럿어.”
혜경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할머니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비는 절벽에서 떨어져 죽었고, 어미는 아들이 감방 간 뒤 실성해서 강물에 몸을 던졌지. 벌써 오래된 일이야… 에이구, 쯧쯧.”
눈시울이 붉어진 혜경은 숨을 삼켰다.
할머니의 말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것뿐만이 아니야. 동혁이 여동생도 오래전에 죽었어. 이름이… 선애였나? 참 예쁜 아이였는디, 갑자기 강물에 몸을 던졌어.”
할머니는 담배를 깊게 빨아들이더니, 한숨처럼 말을 이었다.
“그때 동혁이가 죽은 동생을 부둥켜안고 울부짖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해. 에이구… 정말 끔찍한 일이었지.”
할머니는 잠시 말끝을 흐렸다. 그러다 다시 두 사람을 의심스럽게 바라보았다.
“근데 그놈은 죽일 놈이야. 지 에미까지 죽게 만들고… 근데 또 무슨 일로 찾아왔당가? 형사는 아닌 것 같은디.”
혜경은 이미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어깨가 들썩였다. 지혜가 간신히 되물었다.
“혹시 가까운 친척이 어디 사는지 아시나요?”
할머니는 고개를 저었다.
“그 집안엔 가까운 친척 아무도 없어. 그 일가는 6·25 때 빨갱이들한테 죽고, 또 국군 토벌대에 죽고… 모두 다 죽고 없당께. 다 죽어 버렸어.”
할머니는 먼 산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아들이랑 에미, 단둘이 남았는데 그리 돼 부렀응께… 에미도 실성해서 자살해 부럿재. 우째 살겠노.”
혜경은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소리 내어 울었다.
귀경길.
차 안에는 무거운 침묵만 가득했다.
지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운전대를 잡고 있었다.
간신히 울음을 멈춘 혜경에게 지혜가 손수건을 건넸다.
“미안해. 내가… 또 상처만 줬구나… 하지만 동혁이 너무 가여워.”
지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혜경의 울음이 다시 터져 나왔다.
그녀는 그를 잃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가 어떻게든 이 세상을 견디고 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그런데 그는 이미 속절없이 무너져 있었다.
그 사실 앞에서 그녀는 참담했다. 하지만 다시 단단해져야만 했다.
그녀가 침묵을 깼다.
“어딘가에서 방황하고 있을 그를… 지금 이 순간에도 길을 잃고 헤매고 있을 그 아픈 영혼을… 반드시 찾아낼 거야. 무슨 일이 있어도.”
그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짧은 한숨도 섞였다.
“혼자서는 견뎌 내지 못했을 그 긴 세월을… 이제는 내가 붙잡아 줄게. 함께 버텨 줄게. 다시는…혼자 두지 않을 거야.”
그녀는 숨을 삼켰다. 고개를 들었다.
“절대로… 혼자 무너지게 두지 않을 거야. 언제나 내가 꼭 안아 줄 거야.”
또다시 그녀의 눈물샘이 터졌다. 지혜도 눈물이 앞을 가려 길가에 차를 세워야만 했다.
지혜는 울고 있는 혜경을 힘껏 끌어안았다. 차 안에는 한동안 두 사람의 울음소리만 가득했다.
그러나 그 울음은 절망이 아니었다.
끝까지 놓지 않겠다는 맹세였다.
그날 그녀는 알지 못했다. 그 눈물이, 다시 운명의 문을 열고 있었다는 것을.
☞제 16화 또다른 운명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