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영화는 한 단어로 묶기 어렵다. 어떤 감독은 ‘국가와 역사’의 거대한 프레임을 파고들고, 어떤 감독은 가족의 균열과 침묵을 오래 응시한다. 다른 감독은 장르영화의 엔진을 세계 시장에 맞게 재가공한다. 2026년 시점에서 ‘지금도 살아 있고, 국제적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러시아 감독’ 다섯 명을 꼽아보자. 에디터의 상당히 개인적인 선택이지만 ‘안드레이 콘찰롭스키’, ‘니키타 미할코프’, ‘알렉산드르 소쿠로프’, ‘안드레이 즈뱌긴체프’, ‘티무르 베크맘베토프’를 뽑겠다. 이 다섯 감독은 러시아 내부의 문화 코드와 세계 영화제‧할리우드 시스템을 각기 다른 방식으로 통과해 왔다. 아래에서는 각 감독의 궤적과 함께, 러시아 영화를 잘모르는 한국인들도 곧바로 ‘체감’할 수 있는 독자도 한번쯤은 들어봤을 법한, 혹은 어떤 장면은 한번쯤 봐을 법한 영화, 대표작 5편씩을 골라 심심할 때 볼 만하게 정리한다.
안드레이 콘찰롭스키: 러시아 고전의 체온과 세계 산업의 문법을 동시에 아는 감독 안드레이 콘찰롭스키는 러시아 예술영화의 전통과 상업영화의 제작 문법을 모두 경험한, 말 그대로 ‘양쪽 세계의 언어’를 가진 감독이다. 러시아 내부에서는 대서사와 시대극, 인간 군상의 윤리적 선택을 다루는 작업으로 평가받고, 국제적으로는 러시아 밖 특히 영어권에서의 연출 커리어로도 알려져 있다. 그의 영화는 자주 ‘역사의 압력’ 속에서 개인이 어떤 표정을 짓는지에 집중한다. 거대한 체제의 소음 속에서도 인물의 얼굴, 호흡, 망설임을 놓치지 않는 편이다. 대표작 5편을 꼽자면 《시베리아대》(Сибирский цирюльник) , 《도주열차》(Поезд-беглец) 《바보들의 집》(Дом дураков 《파라다이스》(Рай) 《친애하는 동지들!》(Дорогие товарищи!)
콘찰롭스키는 “러시아적 비극”을 ‘교훈’으로 정리하지 않는다. 오히려 어떤 시대든 인간이 얼마나 쉽게 타협하고, 또 얼마나 늦게 후회하는지를 길게 보여준다. 입문은 《친애하는 동지들!》처럼 비교적 최근작부터 들어가도 좋고, 러시아 대서사 취향이면 《시베리아대》가 강력하다.
니키타 미할코프: 러시아의 ‘국민서사’를 영화로 번역해 온 거장 니키타 미할코프는 러시아 내부에서 대중적 인지도와 문화적 영향력이 큰 감독 중 하나다. 작품은 종종 ‘러시아의 자화상’에 가깝다. 가족, 전쟁, 계급, 명예, 그리고 ‘러시아적 삶의 태도’를 감정의 온도로 밀어붙인다. 동시에 그는 국가적 기억과 개인의 사랑, 배신과 충성 같은 감정의 축을 한 화면에 겹치게 만들며, 관객에게 “당신은 어디에 서 있느냐”를 묻는다. 그의 영화는 클래식한 미장센과 배우 연기 중심의 장면 구성, 그리고 서사의 힘으로 관객을 끌어당기는 편이다. 대표작 5편 《태양에 속다》(Утомлённые солнцем) 《우르가》(Урга — территория любви) 《사랑의 노예》(Раба любви 《12》(12) 《어두운 눈》(Очи чёрные)다.
미할코프는 정치보다 감정의 정치학을 찍는 감독이다. 입문은 가장 널리 알려진 《태양에 속다》가 무난하고, 법정극 형식으로 러시아의 사회적 기질을 보고 싶으면 《12》가 좋다.
알렉산드르 소쿠로프: 시간과 영혼을 촬영하는 ‘철학적 영화’의 극점 ‘알렉산드르 소쿠로프’는 러시아 영화의 실험성과 철학성을 대표하는 이름이다. 그의 영화는 사건을 설명하기보다, 시간 자체를 늘리고 접어서 관객이 느끼게 만든다. 화면은 종종 회화처럼 흐릿하거나, 빛이 번지거나, 인물의 윤곽이 사라질 듯 떠다닌다. 그는 권력, 역사, 그리고 인간의 유한성(죽음, 기억)을 집요하게 건드린다. 특히 “한 국가의 권력은 결국 한 인간의 몸과 신경에서 비롯된다”는 시선을 반복한다. 대표작으로 《러시아 방주》(Русский ковчег) 《파우스트》(Фауст) 《몰로흐》(Молох) 《태양》(Солнце) 《어머니와 아들》(Мать и сын)이 있다.
소쿠로프는 플롯으로 밀어붙이지 않는다. 감각과 분위기, 사유의 리듬으로 관객을 설득한다. 한 번에 익숙해지기 어렵다면, 전설적으로 회자되는 원테이크 영화 《러시아 방주》부터 시작하는 편이 접근성이 좋다.
안드레이 즈뱌긴체프: 현대 러시아의 균열을 가족 드라마로 봉인한 감독 안드레이 즈뱌긴체프는 2000년대 이후 러시아를 세계 영화제의 중심으로 끌어올린 핵심 감독으로 자주 언급된다. 그의 영화는 대체로 가족이 무너지는 방식을 통해 사회가 붕괴하는 소리를 들려준다. 냉정하고 절제된 화면, 긴 침묵, 갑자기 튀어나오는 폭력, 그리고 끝까지 회복되지 않는 상실감이 특징이다. 하지만 그 차가움이 곧 윤리적 분노로 이어진다. 누구도 완전히 무죄가 아니고, 누구도 완전히 구원받지 못한다는 세계관이 그의 작품을 단단하게 만든다. 대표작으로 《귀향》(Возвращение) 《추방》(Изгнание) 《엘레나》(Елена) 《리바이어던》(Левиафан) 《러브리스》(Нелюбовь)
즈뱌긴체프는 “러시아 비판”을 구호로 하지 않는다. 대신 ‘가정’이라는 가장 작은 단위가 무너질 때, 국가와 사회가 어떻게 얼굴을 드러내는지 보여준다. 입문은 《리바이어던》 혹은 《러브리스》가 가장 직관적이다.
티무르 베크맘베토프: 러시아에서 출발해 글로벌 장르영화로 확장한 ‘흥행형 감독’ ‘티무르 베크맘베토프’는 예술영화 계열과 결이 다르다. 그는 장르영화(액션‧판타지‧스릴러)의 시스템 위에서 관객이 “재밌다”라고 즉각 반응하게 만드는 감각을 발전시켰다. 러시아권에서는 특히 ‘도시 판타지’의 흥행을 만들어낸 작업으로 강하게 기억되고, 이후 국제 시장에서 할리우드 프로젝트를 연출하며 활동 반경을 넓혔다. 빠른 편집, 강한 콘셉트, 대중 친화적 세계관이 강점이다. 대표작 5편: 《나이트 워치》(Ночной дозор) 《데이 워치》(Дневной дозор) 《원티드》(Особо опасен) 《에이브러햄 링컨: 뱀파이어 헌터》(Президент Линкольн: Охотник на вампиров) 《베누르》(Бен-Гур)
베크맘베토프는 러시아 영화의 또 다른 얼굴, 즉 “대중 장르로 세계와 경쟁하는 방식”을 보여준다. 러시아 감성과 장르쾌감이 합쳐진 《나이트 워치》‧《데이 워치》 연속 감상이 가장 베크맘베토프다운 입문 코스다.
같은 러시아이면서 다른 러시아 이렇게, 다섯 명의 영화를 한 번에 훑으면, 러시아 영화가 단순히 ‘어둡다‧무겁다’라는 대조논리로써 해석 한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미할코프는 국민서사와 감정의 전통을, 소쿠로프는 철학적 시선과 시간의 실험을, 즈뱌긴체프는 현대 사회의 균열을 가족 드라마로 봉인하는 방식을, 콘찰롭스키는 역사와 인간을 동시에 붙드는 장인성을, 베크맘베토프는 장르영화의 글로벌 확장을 보여준다. 러시아를 이해하는 가장 빠른 길은 뉴스가 아니라 문화일 때가 많다. 바이러시아21이 지향하다는 바다. 이 5명의 필모그래피와 그들의 영화는 그 ‘문화 지도’를 펼쳐보는 도구가 된다.
최승현 에디터 buyrussia21@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