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Oct 2026

소설 연재) 데칼코마니 신들의 화폐 - 제 19화 쌈짓돈의 복수

 

한반도 위기를 촉매재로 삼아 한-미 양국의 최고위층에서 벌어지는 카지노 자본주의, 국가 권력이 금융시장의 핵무기 격인 파생상품으로 '잭팟'을 노리는 거대한 음모를 담은 본격 추리 소설 '데칼코마니-신들의 화폐'를 작가의 양해를 얻어 연재한다.  

☜이 소설은 한반도 위기를 모티브로 한 가상의 추리 소설이며, 등장 인명·지명·기관·사건 등은 사실과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데칼코마니 신들의 화폐 -제18화 은빛 주사위] 에서 계속 

[데칼코마니 신들의 화폐 –
제19화 쌈짓돈의 복수]

혜경은 동혁을 만난 뒤 조금씩 생기를 되찾았다. 그녀의 슬픔은 더 이상 상처가 아니었다. 오랜 세월을 견뎌낸 단련된 빛이 되었다. 
그녀는 절망의 끝에서도 그 상처를 부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상처 속에서, 더 큰 사랑이 완성되었다. 

그녀의 사랑은 소유가 아니었다. 치유의 손길이었다. 

동혁을 바라보는 혜경은 늘 평온했다. 마치 오랜 세월 그를 기다려 온 영혼처럼, 그녀는 그를 품은 사랑의 온기로 세상을 밝힐 조용한 불빛이 되어 가고 있었다. 

그 무렵, 동혁도 오랜 침묵을 깨고 다시 세상으로 걸어 나왔다. 운동권 선후배들의 전적인 신뢰 속에, 그는 이제 유력한 정치인이 된 유상욱 의원의 곁에서 보좌관으로 일하며 다시 현실의 전장에 뛰어들었다. 

그의 눈빛에는 아직 꺼지지 않은 이상이 불타고 있었다. 

한편, 서로의 엇갈린 사랑을 받아들인 네 사람은 매달 마지막 금요일 밤, 궁전호텔 스카이라운지에 모였다. 그곳에는 서울의 불빛이 강물처럼 흘러들었다. 

그들은 만날 때마다 웃고, 마시고, 때로는 시답잖은 농담을 주고받았다. 그러나 누구도 사랑이라는 말만은 쉽게 꺼내지 않았다. 그 말 하나가 오래 봉인해 둔 상처를 다시 꺼내 서로를 흔들 수 있다는 사실을, 네 사람 모두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말 대신 그들은 서로의 잔을 채워 주고, 눈빛으로 안부를 묻고, 가만히 곁에 있어 주었다. 그들은 결혼보다 존재의 균형을 택했다. 

세월은 사랑이라는 글자를 빛바랜 표지로 만들었고, 그 위에 조용히 먼지가 내려앉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 모임의 폭이 조금씩 넓어지기 시작했다. 먼저 혜경의 절친인 서지혜와 그녀의 남편 김기용이 합류했다. 지혜는 역사 전공자였다. 호방하고 유쾌한 성격 덕분에 누구와도 금세 친구가 되었다. 

기용은 독립운동가의 후손이었다. 문학을 전공한 자칭 소설가였으나. 아직 완성작은 없었다. 그는 민족문제연구소의 핵심 회원으로, 독립운동가들의 업적을 기록하고 친일과 매국의 잔흔을 추적하고 있었다. 

그런 그가 친일파 후손인 지혜와 사랑에 빠졌다는 것은, 역사의 반어법 같았다. 지혜는 부모의 완강한 반대를 무릅쓰고 집을 나왔고, 첫 아들의 돌 무렵에야 비로소 결혼을 허락받았다. 

지혜는 가끔 남편을 향해 농담처럼 말했다. 
“난 할아버지의 과오를 사랑으로 갚는 중이야. 대신 평생 할부야.” 

농담이었지만, 그 말에는 진심이 숨어 있었다.

얼마 후, 동혁은 대법원 사건으로 함께 투옥됐던 대학 동창 최기영을 데려왔다. 든든한 집안의 배경 덕분에 선고유예로 풀려났던 그는 그 후로 줄곧 부끄러움을 짊어지고 살아왔다. 그러나 사법시험을 거쳐 변호사가 되었고, 평생 무료 법률고문을 자처했다. 

또 한 사람이 늘었다. 정연의 고교 동창 최훈이었다. 그는 KAIST 교수이자, 미 MIT 대학에서 인공지능(AI) 분야 박사 학위를 받은 석학이었다. 평소에는 과묵했지만, 로봇과 인공지능 이야기가 나오면 새벽까지 멈추지 않았다. 

가벼운 취기가 오른 그가 단호한 어조로 말을 꺼냈다. 
“AI가 인간을 대체하고 있어. 마치 광속처럼 너무 빨라. 세상이 한순간에 달라지고 있어.” 

경제 관련 기사를 주로 써 온 혜경이 그의 말을 받았다. 
“맞아. 요즘은 공장에서도 사람을 찾기 힘들어. 대부분 로봇이야.” 

동혁이 낮게 덧붙였다. 
“노동력과 창조의 가치를 상실한 인간은… 과연 어떤 존재일까?” 

역사를 전공한 지혜가 말을 받았다.
“노동과 창조의 영역을 인공지능에게 빼앗긴다면, 인간의 존엄은 흔들릴 수밖에 없어. 인류 멸시의 시대를 넘어, 결국 인류 배척의 시대가 오겠지. 역사를 살펴보면 답은 이미 나와 있어.” 

그때 침묵하던 최기영이 입을 열었다. 
“결국 정치는 시대를 앞서야 해. 미래 인류의 자화상을 미리 법과 제도에 녹여 내지 않으면, 인간의 존엄성은 허상에 불과해질 거야.” 

기용이 호응했다. 
“맞아. 옛날에는 민중 혁명이 가능했어. 하지만 지금은 미사일과 핵의 시대야. 죽창으로는 맞설 수 없지. AI 시대가 오면 민중 혁명 자체가 불가능해질지도 몰라.” 

잠자코 와인을 마시고 있던 창근이 끼어들었다. 
“그 말도 맞아. 그래도 인간에게는 양심과 신념, 신앙과 도덕심이 있잖아. 하지만 군과 경찰이 AI나 인공 인간으로 대체되는 순간, 그 마지막 제동 장치마저 사라질 거야. 그러면 오직 힘의 논리만 세상을 지배하게 되겠지.” 

그는 와인잔을 가볍게 굴리며 말을 이어 갔다. 
“그뿐만이 아니야. 정보의 집중은 권력의 무기가 될 거야. 전 인류가 감시받고 통제받는 세상이 되어 버리는 거지. 지금도 소비 성향뿐 아니라 생각의 패턴까지 읽어 내잖아. 정보 조작, 감정 설계, 여론 통제는 앞으로 더 정교해질 뿐 멈추지 않을 거야.” 

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AI의 시대는 곧 권력 집중의 시대가 될 수도 있어.”

방 안의 공기가 점점 무거워졌다. 그때 혜경이 나섰다.
“맞아. 하지만 AI는 새로운 혁명이 되고 있어. 아니, 그 이상일 거야. 특히 대한민국의 산업 기반은 AI 시대에 잘 맞춰져 있어. 이 구조는 앞으로 엄청난 성장 동력이 될 수도 있어.” 

흥미롭게 듣고 있던 정연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럼 주식 투자는 AI, 반도체, 전력 관련주에 ‘올인’해야겠네.”

그녀가 확인을 받으려는 듯 최훈을 바라보자, 최훈은 미소 지으며 잔을 내려놓았다.
“맞아. AI 시대는 우리에게 폭발적인 성장을 제공할 거야. 문화적 한류에 이어 경제적 한류가 다가올 수도 있지.”

그의 표정이 다시 진지해졌다. 
“하지만 지금은 인류 문명의 대전환점이야. 그러니 더더욱 정치가 중심을 잡아야 해. 동혁, 자넨 어떻게 생각해?”

동혁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나도 공감이야. 미래의 인류 사회는 AI 덕분에 번영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동시에 AI는 단 한 명의 정치 지도자에게 인류 전체를 벼랑 끝으로 밀어붙일 힘을 쥐여 줄 수도 있어.”

동혁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짧은 침묵 사이로 방 안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때 혜경이 끼어들었다. 
“그래도 난 AI가 반드시 두려움의 대상만은 아니라고 봐. 인간이 사랑의 온기로 AI와 공존할 수 있다면, 인류는 처음으로 노동의 굴레를 넘어설 수도 있어. 결국 문제는 인간이 AI와 어떤 방식으로 공존하느냐, 바로 그 지점 아닐까?”

그녀의 시선이 동혁에게 머물렀다. 동혁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야. 반드시 그렇게 되어야겠지. 하지만 인간은 이익과 지배 앞에서 늘 탐욕을 선택해 왔어. 결국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AI가 그 탐욕을 계산하고 증폭시키는 거대한 엔진이 될 가능성이야.”

그의 시선이 천천히 아래로 떨어졌다. 동혁은 마치 다음 말의 무게를 가늠하듯 잠시 숨을 고른 뒤 입을 열었다.
“그래서 더더욱 세계 최강국인 미국의 대통령을 잘 뽑아야 해. 인간의 존엄을 지켜 낼 건강한 양심을 가진 사람을 말이야. 그렇지 않으면 세상은 정말 심각한 위기에 빠질 거야.”

동혁은 최훈을 바라보며 마무리했다. 
“그런데 과학계에서는 인류의 미래를 어떻게 보고 있어?”

최훈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무겁게 대답했다.
“오늘 우리가 한 이야기 그대로야.” 

그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문제는 AI보다 먼저 타락할 존재가 인간 자신이라는 거야. 진짜 위험은 AI가 아니라, 그것을 통제하는 권력, 그리고 그 권력을 손에 쥔 정치야. 아까 동혁이 미국의 대통령을 잘 뽑아야 한다고 한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봐.”

최훈은 한숨을 내쉬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탐욕이 먼저 인류를 무너뜨린다는 거지. 탐욕의 논리에는 효율만 남고 윤리는 사라져. 그리고 곧 정치는 인간을 아주 쓸모없는 존재로 분류하게 될 거야. AI가 그 모든 걸 더 싸고, 더 빠르고, 더 완벽하게 대신할 테니까.”

그는 와인잔을 들어 단숨에 들이켰다. 그리고 다시 말을 이어 갔다.
“처음에는 권력이 부자들이 아니라 사회적 약자들을 먼저 배제하겠지. 그런데 더 무서운 건 그다음이야. 인간이 자기 판단을 포기하고, 신의 자리를 AI에게 넘겨주고 싶어 하는 순간 말이야.”

그의 목소리는 낮아졌다.
“어쩌면 인간이 오래전부터 상상해 온 신이라는 존재가, 거짓과 진실, 정의와 불의를 완벽히 가려내는 완전한 지성이었는지도 몰라. 그런 의미에서 AI는 인간이 상상한 신의 자리에 가장 먼저 다가갈 수도 있어.”

모두가 그의 입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AI란 지성이 인간의 품성을 판독하기 시작한다면, AI는 곧장 인간 감별사가 되는 거야. 가장 정확한 심판자가 될 수도 있어. 그리고 결국 탐욕에 찌든 인간은 정의롭지 않은 존재, 더는 쓸모없는 존재로 분류될 테니까. 탐욕에서 자유로운 인간은 결코 많지 않잖아.”

최훈은 씁쓸하게 웃었다.
“그래서 난 결혼도 하지 않을 거고, 결혼해도 자식은 갖지 않을 거야.”

무거워진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정연이 웃으며 끼어들었다. 
“장가는 뭐 아무나 갈 수 있나? 무능력자의 변명이 하나 더 늘었네.”

그 말에 몇몇이 피식 웃었다. 하지만 눈치 없는 최훈은 멈추지 않았다. 
“딱 걸렸네. 하하. 그런데 하던 말을 더 이어 가면, 마지막 공포는 그다음이야. 인간이 무력화된 뒤에 일어날 AI들의 전쟁이지. 훨씬 더 잔인하고, 더 참혹한 전쟁이 될 거야. 그것이야말로 인간이 지구에서 완전히 삭제되는 대재앙일지도 몰라.”

순간, 방 안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최훈은 좌중을 둘러보며 냉소하듯 말했다.
“하여간 내가 보는 미래는 너무 어둡고, 너무 끔찍하거든. 그런 참담한 세상에 자식을 두고 나만 갈 순 없잖아. 다만 이 모든 게 망상이길 바라야지.”

누구도 쉽게 말을 잇지 못했다. 무거운 침묵이 이어졌다. 최훈이 방금 자신이 한 말을 지우려는 듯 농담을 던졌다. 
“분위기 전환을 위해 고백 하나 하지. 내 첫사랑이자 마지막 사랑은…음... 정연이었어.”

그리곤 농담이라고 우겼지만, 모두에게는 진심으로 들렸다. 

최훈의 농담같은 고백은 사랑이 교차된 네 사람의 가슴에도 무겁게 내려앉았다. 잠시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정연이 웃으며 최훈의 어깨를 가볍게 쳤다. 
“이번 생엔 나 닮은 인공 인간이랑 살고, 다음 생엔 나랑 살아.” 

그제야 모두가 웃음을 터뜨렸다. 잔이 부딪쳤다. 

사진출처:픽사베이
사진출처:픽사베이

 

 

 

다시 침묵이 이어졌다. 그들의 사랑은 소유의 언어가 아니었다. 품을 수 없어도 사라지지 않는, 영혼의 교감이었다. 

혜경이 잔을 내려놓으며 애써 밝은 톤으로 말했다. 
“그래도 난, AI가 인간의 어두운 욕망만은 닮지 않았으면 해.” 

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 향했다. 혜경은 천천히 말을 이었다. 
“AI가 끝내 사랑과 정의를 포기하지 않는 지성이라면, 어쩌면 인간이 꿈꾸어 왔던 신 같은 존재에 가까워질지도 몰라. 난 그런 가능성을 믿고 싶어. 그래서 그런 소망도 품어 봐.”

또다시 침묵이 흘렀다. 그러나 그 침묵은 조금 전의 공포와는 달랐다. 마치 희미한 희망 하나가 무거운 공기 사이로 조용히 스며든 듯했다. 

어쩌면 AI는 인간의 민낯을 확대하는 공포이면서, 동시에 더 나은 공생의 길을 비춰 주는 양면의 거울인지도 몰랐다. 

그때까지 잠자코 듣고 있던 지혜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난 이 모임이 너무 좋아. 우리 이 모임 이름을 Some Day로 하자.” 

Some Day. 
그 이름은 끝내 버릴 수 없는 약속처럼, 언젠가 반드시 이루어질 희망처럼, 그들의 마음속에 조용히 흐르고 있었다. 

그녀가 제안한 규칙은 세 가지였다.
“첫째, 존칭 금지. 둘째, 가식 금지. 셋째, 계산 권한은 창근과 기용에게만 있다. 누구도 이를 탐하지 않는다.”

박수가 터졌다. 그들은 그렇게 세상사 주요한 흐름을 짚고 의견을 나누고, 막판에는 웃고 떠들었지만, 그 웃음 하나하나에는 저마다의 상처가 숨어 있었다. 

인생은 거울과도 같았다. 
누군가는 죽고 싶은 아픔을 껴안고 살아야 했다. 누군가는 영혼이 찢어지는 증오를 삼켜야 했다. 그리고 늘 웃으며 세상을 살아가야 했다. 그래서 누구도, 인생이란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마음을 타인이 온전히 들여다보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것이 인간이라는 이름이 짊어진 고독한 숙명이었다. 

그러나 그들 사이에는 어떤 비밀도, 위선도 들어설 틈이 없었다. 

“세상을 한번 뒤집어 봐. 우리가 힘이 되어 줄게.” 
그날 밤의 취중 진담은 늘 세상을 바꾸는 질문과 해답으로 변주되었다. 그들이 나눈 것은 술잔이 아니었다. 미래의 설계도였다. 

혜경은 그 화두를 놓치지 않았다. 그들의 대화는 견고한 리포트로 다듬어져, 동혁의 책상 위에 한 장 한 장 겹겹이 쌓여 갔다. 

그녀는 또 다른 그였다. 그의 영혼을 반사하는 거울이었다. 

동혁의 신념과 이상은 혜경 안에서 재구성되고 숙성되어 더욱 단단해졌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의 언어로 다시 완성되어 그에게 되돌아왔다. 

오랜 세월, 세상과 단절되었던 동혁에게, 혜경의 리포트는 숨구멍이었다. 

보좌관에 불과하던 그의 입지도 날로 단단해졌다. 그들의 대화도 단순한 토론이 아니었다. 그 속에서 무혈 경제 혁명이라는 씨앗이 조용히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동혁은 금융 전문가인 창근에게 유달리 많은 질문을 던졌다. 
“국내에서 파생상품 수익률이 가장 높았던 때는 언제고, 어느 정도였지?” 

창근은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종류와 기준에 따라 다르지만, 옵션만 놓고 보면 9·11 당시 하루에 증거금 대비 최대 5,000배까지 뛴 사례가 있어. 도이체 방크 사태 때는 10분 만에 2,500배까지 치솟았고.”

동혁은 깜짝 놀랐다.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그렇게나? 그럼 1억이 졸지에 수천억이 된다는 거야?”

그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우와. 순식간에 대박 아니면 쪽박. 알거지 아니면 벼락부자. 이건 거대한 카지노야.”

그의 표정은 곧 굳어졌다.
“그런데 그 돈은 보통 누가 벌고, 누가 잃어?”

창근의 대답은 담담했다.
“대개 외국 거대 펀드가 이기고, 개인은 늘 잃어. 국내 기관도 마찬가지고.”

창근은 외국계 거대 자본의 시장 지배 구조와 기술적 기법들을 차트로 짚어 가며 설명했다.

동혁은 차트를 바라보며 낮게 말했다.
“결국 소수가 설계한 규칙에 다수가 걸려드는 구조군. 이것 역시 또 다른 착취의 고리야.”

분노로 굳어진 동혁의 얼굴을 바라보며 창근이 말을 이었다. 
“얼마 전에 뉴스에 도배된 OK 그룹 채 회장과 그 동생 사건도 파생상품 투자 때문이었어.”

동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봤어. 채 회장이 그룹의 금융 전문가들을 총동원하고도 모자라, 김 모라는 역술가까지 불러들였잖아. 결국 회사 자금에까지 손을 댔다가 결국 구속됐지.”

창근은 씁쓸한 표정으로 가볍게 웃었다.
“그래서 파생상품을 악마의 손이라고 부르는 거야. 원수에게 철저히 복수하려면 쌈짓돈을 쥐여 줘서라도 파생을 매매하게 하라는 말이 있을 정도니까.”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혜경이 끼어들었다.
“그러니 일반 개미 투자자들은 매번 그들의 장기판 위 말이 되는 거야. 금융 시장은 빈곤 양산 공장이 되고, 결국 경제 식민지가 되는 구조지.”

잠시 생각에 잠겼던 동혁이 다시 물었다.
“만약 한반도에서 전쟁이 난다면?”

창근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건 상상하기 싫지만, 주식은 폭락하겠지. 대신 파생은 천 배, 만 배, 때로는 그 이상도 가능해.”

동혁은 말없이 턱을 괴었다. 그의 눈빛이 깊어졌다.
“그럼 프롬펠 같은 권력자는 마음만 먹으면 수백억 달러도 챙기겠군.”

창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그의 DNA 자체가 편법과 탈법의 교집합이야. 늘 각종 불법 행위로 도마 위에 오르지만, 언제나 빠져나가. 게다가 금융 시장의 생리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 당연히 그렇게 하고 있을 거야.”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덧붙였다.
“아마 지금도 모니터를 들여다보고 있을 거야. 사람들의 절망이 자기 계좌에서 얼마짜리 숫자로 불어났는지 확인하면서. 웃고 있겠지.”

동혁은 숨을 삼켰다. 마치 그 장면을 훔쳐보는 느낌이었다. 
“나도 좀 찾아봤어. 이민자를 배척하는 그도 결국 이민자의 후손이야. 그의 할아버지는 고향으로 돌아가려 했지만, 모국의 정부는 불법 사업 전력을 이유로 그를 받아 주지 않았지. 이 하찮아 보이는 일화가 지금 세계의 역사를 뒤트는 단초가 된 것도 역사의 아이러니야.” 

그는 허탈한 듯 웃었다. 그때 혜경이 그 말을 받았다. 
“미국에 이민자가 아닌 사람이 어디 있겠어. 그런데 역사를 바꾼 것은 언제나 정의가 아니라 분노였어. 그도 히틀러처럼 분노를 유발하고 조장해서 온갖 이득을 보려는 거지.”

그녀의 눈동자에 분노가 서렸다. 창근이 멈췄던 말을 이어 갔다.
“맞아. 그자의 얼굴에는 오직 탐욕밖에 안 보여. 그런데 흔히 사람들은 주식 시장이 오르면 돈을 벌고, 내리면 돈을 잃는다고 착각하지.”

동혁이 되물었다.
“그렇지. 다들 그렇게 알고 있잖아. 아니야?”

창근은 잠시 말을 고르듯 입술을 다물었다. 그리고 낮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정보는 곧 돈이다. 이런 말 들어 봤지?”

그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불편한 진실을 꺼내듯 천천히 말을 이었다.
“최고급 정보의 창조자들, 이를테면 미국 대통령 프롬펠 같은 권력자, 그리고 그 추종자들. 그들이 호재와 악재를 뒤섞어 세상에 흘려보내면, 그것은 곧 거대한 혼돈이 돼. 그리고 그 혼돈에는 즉시 가격표가 붙지.”

창근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그러나 그 안에 담긴 결론은 칼날처럼 차가웠다.
“그 혼돈은 곧장 돈으로 환산되어 시장에서 거래돼. 하지만 진짜 큰돈은 언제나 공포를 동반한 거대한 혼돈에서 나와. 순식간에 거대한 돈을 쓸어 담을 수 있거든.”

그는 창밖을 바라보며 덧붙였다.
“금융시장에는 언제나 재앙의 상인들이 도사리고 있어. 그 순간만을 기다리면서. 권력을 움켜진 자들에게 전쟁 같은 악재는 곧 최고의 호재야. 가장 손쉬우면서도 가장 엄청난 잭팟이지.”

조용히 듣고 있던 혜경이 결국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그가 했던 아주 유명한 말이 있어. 인간은 오직 승자와 패자만 있을 뿐이고, 그것이 자연의 법칙이라는 말. 그 한 줄의 잔인한 신념이 세계의 윤리를 무너뜨렸어. 그 말은 사회적 약자는 사라져야 한다는 선언이잖아. 그 사람… 마치 괴물 같지 않아?” 

침묵이 흘렀다. 창근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그녀의 말을 받았다.
“오늘 화가 많이 나셨네. 하하. 그런데 요즘 세상엔 괴물 아닌 사람이 별로 없어. 다만 우아한 위선과 세련된 가식으로 잘 포장한 괴물이 조금 더 나아 보일 뿐이지.”

“그래. 맞는 말이야. 위선과 가식은 뒤틀린 인간의 본성이 문명화된 또 다른 폭력인 것 같아. 권력은 그렇게 우아하게 포장된 폭력을 정의를 앞세워 가장 감쪽같이 행사하지.” 
혜경은 잠시 말을 멈췄다. 창밖을 향하던 그녀의 시선이 천천히 다시 돌아왔다. 

“하지만 세상이 이렇게 각박해지는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어. 광기에 사로잡힌 그를 모방하는 정치인들이 전 세계에 얼마나 많아졌는데.” 

그녀의 목소리가 단호해졌다. 
“한마디로 말하면, 그는 악의 축이야.”

늘 다소곳하던 혜경이었지만, 오늘만큼은 거침이 없었다.
“한 사기꾼이 미국적 가치를 송두리째 팔아먹은 거야. 존중받던 미국의 이름은 이제 두려운 권력의 얼굴이 되어 버렸어. 그는 한 나라의 대통령이라기보다, 인류의 양심을 빨아먹는 탐욕의 연가시야.”

그녀의 목소리는 한층 더 높아졌다.
“그 늙은 양아치가 분명 막대한 뒷돈을 챙기고 있다. 난 거기에 99.99%를 걸겠어.”

혜경은 확신하고 있었다. 동혁은 그녀의 말을 하나씩 되새기더니 한바탕 웃었다.
“99.99%라. 사기꾼, 양아치, 히틀러, 괴물, 악의 축… 하하하.” 

그러나 그 웃음 속에는 서늘한 깨달음이 섞여 있었다. 동혁에게 평소와 다른 혜경의 격한 표현은, 듣기만 해도 속이 후련하고 통쾌했다. 

“결국 한 양아치가 인간의 이기심과 가학성을 자극해 대통령이 됐고, 그 뒤에서는 탐욕의 호박씨를 마구 까고 있다. 그 말씀이네.”

동혁에게 평소와 다른 혜경의 격한 표현은, 듣기만 해도 속이 후련하고 통쾌했다.

“난 99.99%가 아니라 100%에 걸겠어.”
동혁은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그는 오늘 새로운 사실을 더 명확한 문장으로 확인한 것이다.

그날 이후, 동혁은 프롬펠의 돌발적인 언행을 그냥 흘려보내지 않았다. 그는 프롬펠의 언행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그의 생각과 확신의 온도를 높여가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날, 그는 불쑥 입을 열었다.
“우리 같은 약소국이 강대국이 되는 방법은 없을까? 도깨비방망이 같은 거 말이야.”

농담처럼 던진 말이었다. 하지만 혜경은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있어. 발상의 전환을 해 봐야지.”

그녀는 프로젝터 위에 세 단어를 썼다.
몽골.
유대인.
한민족.

모두의 시선이 그 단어들 위에 멈췄다.
“세 민족은 교집합을 가졌어. 모두 세계사의 변방이자 소수민족이었지. 하지만 각자의 방식으로 세계를 움직이고 지배했어.”

그녀는 첫 번째 단어를 가리켰다. 
“몽골은 결집과 기동력으로.” 
“유대인은 금융과 네트워크로.”

그녀는 한민족이라는 단어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우리는 정과 한류, 즉 문화로.”

그녀의 눈이 반짝였다.
“이제는 우리가 총 대신 전략으로, 피 대신 아이디어로, 또 한 번 역사를 바꿀 차례야.”

도시의 불빛이 겹쳐지는 스카이라운지의 밀실은 단순한 만남의 장소가 아니었다. 미래를 설계하는 거대한 정책 실험실이었다. 

그들의 소망. 그들의 설계. 그들의 계산. 
모든 것이 완벽해 보였다. 

마침내 새 정부가 들어섰다.
운동권 출신들이 정계와 관계의 주요 요직에 올랐다.
유상욱 의원이 대통령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각종 공약과 정책 구상을 제공한 동혁은 새 정부의 대통령 비서실장으로 임명되었다.

권력은 그의 손에 쥐어졌고, 세상의 판을 뒤흔들 모든 준비는 끝난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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