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위기를 촉매재로 삼아 한-미 양국의 최고위층에서 벌어지는 카지노 자본주의, 국가 권력이 금융시장의 핵무기 격인 파생상품으로 '잭팟'을 노리는 거대한 음모를 담은 본격 추리 소설 '데칼코마니-신들의 화폐'를 작가의 양해를 얻어 연재한다.
☜이 소설은 한반도 위기를 모티브로 한 가상의 추리 소설이며, 등장 인명·지명·기관·사건 등은 사실과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데칼코마니 신들의 화폐 -제20화 또 다른 작별]에서 계속
[데칼코마니 신들의 화폐 –
제 21화 킹메이커의 야망]
“VIP 호출입니다.”
회의를 주재하던 동혁에게 비서가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전했다. 대통령의 긴급 메시지였다. 그는 곧바로 회의를 정리하고 대통령 집무실로 향했다.
청와대의 긴 복도에는 묵직한 정적이 흘렀다. 그 적막은 권력의 무게처럼 다가왔다.
집무실 문이 열렸다.
책상 위에는 당당히 놓인 팻말 하나가 보였다.
대통령 유상욱.
그 이름이 번듯하게 새겨져 있었다.
대통령은 고급 의자에 몸을 반쯤 기댄 채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동혁을 보자마자 반색하며 손을 내밀었다.
“전 실장, 어서 와.”
대통령은 그의 손을 잡고 환하게 웃었다.
“자네가 작성한 정책기획서는 언제 봐도 걸작이야. 하나하나 잘 챙기게. 하하하.”
대통령은 격려와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덕분에 국민 모두 큰 기대를 하고 있습니다.”
동혁은 담담하게 말했지만, 사실이었다.
이미 수많은 혁신안이 확정되었고, 그 정책들은 동혁의 손에서 하나씩 현실이 되고 있었다.
대통령은 찻잔을 들어 올리며 물었다.
“복지와 통일 펀드, 그 국민 펀드 모금이 또 끝났다지?”
“네. 불과 한 달 만에 100조 원이 추가로 모였습니다. 현재 총 200조 원입니다. 5차 모금까지는 순조롭게 진행될 것으로 보입니다.”
“정말 수고했네.”
대통령은 원래 신중하고 치밀한 성격이었다. 그러나 동혁에게만큼은 늘 관대했다.
찻잔의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대통령의 시선이 창밖을 넘어 북악산 능선에 머물렀다. 동혁이 설계했던 수많은 정책들이 하나씩 떠올랐다.
국민 펀드.
그것은 복지 펀드와 통일 펀드로 구성된 국가 주도형 프로젝트였다.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고, 통일 이후를 대비하기 위해 설계된 거대한 실험이었다.
각 펀드는 1차로 50조 원씩 모집되었다. 이미 두 차례 모금이 마감되었고, 총액은 200조 원에 달했다. 정부는 저소득층을 대상으로 적립금의 절반까지 무상 지원했다.
게다가 수익 보장책까지 내거는 전대미문의 조건이었다. 다만 연간 수익이 10%를 넘으면, 초과 이익의 최대 80%는 복지나 통일 기금으로 환원되었다.
그것은 통일 대비, 빈부 격차 완화, 극빈층 지원, 공정한 부의 재분배를 동시에 겨냥한 정책이었다. 대통령의 핵심 공약이자, 동혁의 첫 번째 설계였다.
지하궁전 프로젝트.
주택 가격은 끝을 모르게 치솟고 있었다. 소득은 제자리였다. 내 집 마련은 중산층조차 꿈꾸기 어려운 시대가 되었다. 후보 시절부터 유상욱의 가장 큰 고민은 바로 주택 문제였다.
대통령 후보였던 상욱은 바쁜 대선 캠페인 중에 동혁을 불러 이렇게 물었다.
“아우님, 집값이 폭등해 나라가 시끄럽네. 반값 아파트, 무상 임대 아파트, 뭐 이런 뾰족한 대책이 없겠는가?”
그때 동혁은 뜻밖의 말을 꺼냈다.
“땅 위에 해법이 없을 땐, 땅 아래로 들어가야죠.”
상욱은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이 사람아, 난 주택 얘기를 했는데, 왜 갑자기 지하 대피 시설 얘기를 하나? 나 지금 바쁘네.”동혁은 물러서지 않았다.
“바로 그 지점입니다. 주택 문제의 해법은 지하에서 찾아야 합니다. 반값 아파트와 무상 임대 주택은 지상만이 아니라, 무한한 지하 공간을 함께 활용해야 비로소 완전한 해결이 가능합니다.”
상욱의 웃음이 서서히 멎었다. 동혁은 차분히 말을 이었다.
“무한한 지하 공간은 버려진 자산이 아니라 숨은 국토입니다. 특히 한국은 건설, 토목, IT 분야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그의 목소리가 낮고 단단해졌다.
“이제 빛을 잃은 세상에도 빛을 심을 때가 된 것입니다.”
상욱의 눈빛이 미묘하게 바뀌었다.
“지상과 지하라… 음, 계속해 보게.”
동혁은 준비된 듯 설명을 이어 갔다.
“전쟁의 위험에 직면한 나라가 모든 군사와 행정 기관, 도로와 철도를 지상에 두는 건 비상식적입니다. 주요 시설을 지하 깊숙이 이전하고, 그 부지를 주택지로 제공한다면 전쟁 대비는 물론 무상 택지 공급도 가능합니다.”
상욱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오… 획기적인 발상이군. 계속 말해 보게.”
“장기적으로는 주요 대도시의 지하 공간을 활용해 주거 단지를 조성할 수 있습니다. 누구나 살고 싶어 할 만큼 현대적이고 안전한 지하 도시를 짓는 겁니다. 마치 지하궁전처럼 말입니다.”
상욱이 중얼거렸다.
“지하 주택… 지하궁전 프로젝트?”
동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런 구상입니다.”
“오, 획기적인 발상이군. 거의 무상으로 택지 공급도 가능하겠고. 하지만 과연 누가 지하에서 살려고 하겠나?”
상욱의 우려에 동혁은 잔잔히 미소 지었다.
“지금 그 말씀은... 그러나 머지않은 미래에 그렇게 바뀔지도 모릅니다.”
“허허. 이 사람 참, 너무 나가는 것 아닌가?"
동혁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설명을 이어 갔다.
“예컨대 대도시의 도심 공원이나 골프장 지하에 궁전 같은 지하 도시를 건설하는 겁니다. 낮에는 지상 공원에서 산책하고, 밤에는 지하에서 안락하게 거주할 수 있죠.”
그는 손끝으로 공중에 보이지 않는 단면도를 그렸다.
“도시 내의 도로, 철도, 강과 하천 아래도 좋은 지하 부지입니다.”
동혁의 설명은 점점 구체화되었다.
“지하궁전은 값싼 주거 공간이나 단순한 방공호가 아닙니다. 상상을 초월하는 고급 생활공간입니다. 천장은 투명 광섬유 돔으로 설계해 지상의 햇빛이 자연스럽게 아래로 흘러들게 합니다. 계절에 따라 밝기가 자동 조절되고, 벽면은 식물 공기정화 시스템으로 덮여 있어 늘 신선한 공기가 순환됩니다.”
상욱은 어느 순간 설명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각 구역은 주거, 행정, 상업, 의료, 문화 시설로 구분됩니다. 초고속 엘리베이터와 자기부상 트램이 사람들을 몇 분 이내에 연결합니다. 조명은 일출과 일몰에 맞춰 색온도를 바꾸고, 스마트 창은 숲이나 바다의 영상으로 계절에 따라 전환됩니다.”
동혁의 눈빛이 깊어졌다. 그는 마치 지금 지하도시에 살고 있는 사람처럼 생생하게 설명을 이어 갔다.
“중앙에는 인공호수가 있고, 그 위로 유리돔 산책로가 펼쳐집니다. 실내 공원에는 실제 나무와 새소리가 어우러지고, 산소 농도는 울창한 숲속과 같은 수준으로 자동 조절됩니다.”
상욱의 표정이 달라졌다. 마치 눈앞에 미래도시의 영상이 펼쳐지고 있는 듯했다.
동혁의 설명은 이어졌다.
“각 가정은 AI 기반 에너지 관리 시스템으로 전력 소비를 자동 최적화하고, 생활 폐기물은 지하 진공 수송관으로 실시간 처리됩니다.”
그때 상욱이 입을 열었다.
“그럼 도시가 오히려 더 깨끗하겠군.”
동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네, 보다 중요한 점은 지진과 폭격에도 매우 안전하다는 것입니다.”
말을 마친 동혁이 두 손을 모았다. 상욱의 눈빛은 완전히 달라졌다.
“그럼, 지하에 지상보다 오히려 더 안전하고 편리한 도시를 만든다는 말이군?”
“맞습니다. 생활공간의 개념이 바뀌는 겁니다. 땅이 좁은 나라일수록, 땅의 깊이는 국력입니다.”
“하하하! 기막힌 발상이야.”
상욱은 엄지를 치켜세웠다.
“반값 아파트나 무상 임대 아파트는 이제 가난의 상징이 아니라, 품격과 격조를 품은 미래의 공간이 되겠군. 새로운 낙원의 상징… 바로 그거였어.”
동혁이 목소리에 힘을 실어 강조했다.
“핵심은 아주 고급스럽게 건설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첨단시설, 빠른 도심 접근성, 저렴한 관리비까지 갖춘다면 영세민은 물론 청년층, 중산층, 부유층까지 거부할 이유가 없을 겁니다.”
상욱이 환하게 웃으며 결론을 내렸다.
“좋아, 아주 좋아. 교통, 편의 시설, 고급화… 지하 궁전, 바로 그거군. 당장 공약으로 올리세.”
지하궁전 프로젝트는 서민들의 절망에서 새로운 희망으로 떠올랐다. 그것은 단순한 주택 정책을 넘어섰다. 전쟁 대비, 주거 혁신, 경제 활성화라는 세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을 대통령의 핵심 공약으로 자리를 잡았다.
또 다른 설계는 DMZ 개발이었다.
DMZ 개발 청사진.
폭 약 4km, 길이 약 300km에 달하는 광활한 휴면 토지였다. 반세기 넘게 총부리와 지뢰로 봉인된 땅, 한때 죽음의 선이라 불리던 지역이기도 했다.
그러나 동혁의 구상 속에서 그곳은 더 이상 전쟁의 상처로 가득한 땅이 아니었다. 남북이 공동으로 개발해 새로운 미래를 꿈꾸는 땅이었다.
개발 구상은 파격적이었다.
30년 간의 토지 무상 임대와 세금 감면, 그리고 무노조 경영을 보장하는 청사진이었다. 그리고 자연 국립생태공원과 세계적 수준의 카지노와 레저 단지, 첨단 산업 개발 특구, 한류 상설 공연장과 초대형 영화·드라마 세트장까지 유치하는 구도였다.
실현되면 DMZ는 더이상 분쟁 경계선이 아니라, 아시아를 넘어 세계 문화의 심장부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특히 내국인과 외국인이 함께 이용할 수 있는 카지노는 라스베이거스와 마카오를 능가할 글로벌 엔터테인먼트 도시로 향하는 첫 관문이 될지도 몰랐다.
카지노와 레저만이 개발의 전부는 아니었다. DMZ에는 공동의료센터와 국제평화대학, 녹색에너지 연구소 같은 시설들도 들어설 판이었다. 전 세계에 흩어진 분단의 상징들을 하나로 모아 만드는 평화의 랜드마크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대선이 끝난 뒤 주요 글로벌 기업들은 앞다퉈 그곳을 21세기형 한국의 라스베이거스이자 실리콘밸리로 키우겠다는 청사진을 내놓기 시작했다. DMZ가 세계 자본의 블루칩으로 떠올랐다. 오랫동안 막혀 있던 남과 북의 혈류를 다시 잇는 산업 대동맥으로 진화하고 있었다.
남쪽에서 북쪽으로. 나아가 일본에서 노르웨이까지.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신 실크로드의 서막이자 한반도의 심장을 다시 뛰게 만드는 거대한 시나리오였다. 낮에는 AI가 관광객의 이동 동선을 조율하고, 밤이면 DMZ 전역은 거대한 빛의 정원으로 변할 것이 분명했다.
남과 북의 분단 경계선인 DMZ에 남북한과 세계 자본이 함께 투자하고 개발한다면, 그곳은 전쟁을 억제하는 가장 강력한 평화의 방벽이 될 수 있었다. 전쟁의 그림자가 드리웠던 땅이 역설적으로 인류의 평화와 번영의 메카로 변모할 것이다.
또 다른 핵심 정책은 사회적 약자를 위한 '희망 금고'였다. 약 10년 주기로 전 세계에 경제 위기가 밀어닥쳤는데, 그때마다 각국 정부는 숱한 대책을 쏟아냈다. 그 결과는 그러나, 물가만 끌어올렸고, 언제나 영세민에게 부담이 돌아갔다.
시중 은행의 평균 금리는 4% 내외였다. 하지만 사회적 약자들의 대출은 언제나 막혔다. 그들은 여전히 고금리에 시달릴 수 밖에 없었다. 골목의 급전 창구를 찾는 서민들은 연 20%, 30%, 때로는 40%의 살인적인 금리도 감당해야 했다. 그 이자에 짓눌린 삶은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해도 늘 도돌이표였다. 죽을 때까지 가난은 계속되었다.
가난은, 무능력도, 죄도 아니었다. 경제 논리의 구조, 그 빈틈과 틈새에서 비롯된 결과였다. 희망 금고는 바로 그 구조를 뒤집는 실험이자 도전이었다.
금리의 역차별을 시험하는 첫 번째 정책.
부자와 대기업은 고금리로, 서민의 소액 생활 자금 대출은 제로 금리에 수렴하게 설계되었다. 이것은 단순한 금리 정책이 아니었다.
카지노 자본주의의 그늘 아래, 전 세계 1%의 인간들이 모든 부를 움켜쥔 시대에 희망 금고는 짓눌린 약자들의 삶에 잠시라도 숨통을 틔워 주는 장치였다.
소비의 주체인 서민을 보호하는 것은 곧 경제를 구하는 일이었다. 희망 금고가 바로 그 첫걸음이었다. 금융의 순환을 되살리고, 소비를 촉진하며, 공정한 분배를 과감하게 밀어붙이는 다목적 정책이었다.
마지막은 대한민국을 세계 금융의 중심지로 끌어올리는 정책이었다. 바로 세계적인 금융 허브 구상이었다.
새 정부는 주식과 파생상품 규제를 대폭 완화하며 침체된 시장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 넣었고, 거래량을 폭발적으로 늘리는 여러 정책이 발표되었다.
동시에 연기금과 국부 펀드들의 주식 투자 한도도 대폭 상향되었다. 안전이라는 명분 아래 거대한 자금을 금고에 묶어 두고 녹슬게 하던 시대는 끝났다는 선언이었다. 주식을 오래 보유한 기관과 국민에게는 세제 감면은 물론, 인센티브까지 제공했다. 금융 시장의 꺼져 가는 엔진을 최대치로 가동시키려는 시도였다. 단순한 금융 개혁이 아니었다. 대한민국을 세계적 금융 허브로 이끌 첫 신호탄이었다.
그리고 다가올 역사의 반전을 위한 사전 포석이기도 했다.
유상욱 대통령 후보가 TV 연설에서 이러한 공약과 미래 청사진을 발표하자, 국민들은 열광했다.
그날 SNS에는 순식간에 비슷한 문장들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우린 이런 대통령을 기다렸어.”
“이건 우리의 미래야.”
그날 밤, 레스토랑에서 카페에서 술집에서 사람들은 서로 마주 보며 웃었다.
“이런 사람이라면… 정말 세상을 바꿀 수 있겠어.”
이 모든 기획의 중심에는 다른 이름이 하나 더 있었다. 혜경.
동혁과 혜경이 머리를 맞대어 설계한 공약이었다.
동혁은 새로운 질서를 가슴으로 그려 냈고 혜경은 그 질서를 언어와 기획으로 다듬었다.
그리고 상욱이 움직이면, 그 설계는 현실이 되었다. 세 사람은 이제 새로운 시대를 열어갈 삼각 축이었다.
그 공약들은 이제 하나씩 정책으로 실행되고 있었다.
대통령은 서류를 덮었다.
잠시 창밖의 먼 하늘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는 확고한 자신감이 엿보였다.
‘그래, 인류는 꿈을 먹고 산다. 그리고 그 꿈이 간절하다면, 곧 현실이 되겠지.’
침묵이 흘렀다. 대통령의 얼굴에는 야릇한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자네의 수많은 혁신안들은 너무나 훌륭해. 내가 다 실현할 수 없는 게 안타깝네.”
동혁은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그때 대통령이 농담처럼 덧붙였다.
“나머지는 자네가 대통령이 되는 날, 모두 다 실행하시게. 하하하.”
그저 가벼운 농담 같았다. 그러나 방 안의 공기가 순식간에 무거워졌다. 단순한 격려가 아니었고, 차기 권력에 대한 은밀한 암시처럼 들렸다.
“과찬이십니다. 누가 듣기라도 하면 큰일입니다.”
동혁은 겸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그의 앞날에는 이미 또 다른 불씨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는 킹메이커였다.
분명히 한 사람의 대통령을 만들었다.
하지만, 그는 곧 깨닫게 될 것이다.
권력은, 결코 킹메이커의 손안에 오래 머물지 않는다는 사실을.
왕을 만든 자, 그는 반드시 그 왕좌의 무게에 짓눌린다는 것을.
☞제 22화 역사의 반전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