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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의 '워싱턴 외교 참사'는 돌발적인 상황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어떤 정상회담이든 구체적인 협의 내용이나 과정, 분위기는 외교 관례상 거의 드러나지 않는 법이다. 회담 중에 아무리 큰 다툼이 있다고 하더라도, 분위기만 감지될 뿐 확인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모든 내용은 이후 발표되는 공동성명, 혹은 기자회견에서 정리되고 확인된다.
하지만 미-우크라의 워싱턴 정상회담은 경우가 달랐다. 호스트 격인 트럼프 미 대통령은 회담 직후 급히 헬기를 타고 백악관을 떠났고, 젤렌스키 대통령이 유럽 정상들(참가자는 확인되지 않는다/편집자)과 전화 통화를 했다. 주인 없는 백악관의 바깥에서 진행된 그의 브리핑이 당초 예정 시간보다 늦어질 만큼 젤렌스키-유럽 정상들과의 통화는 길었다고 한다.

그 통화에서 젤렌스키 대통령이 유럽 측에 정상회담의 결과나 내용, 분위기 등을 전달하면서 하소연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실제로 유럽 국가의 고위 소식통을 통해 비밀스런 미-우크라 회담장 소식이 하나씩 흘러나오고 있다. 주말이 끼어 있는 탓인지, 월요일인 20일에는 주요 언론들이 앞다퉈 관련 기사를 쏟아냈다.
우크라이나 매체 스트라나.ua는 20일 하루를 정리하는 기획기사 중 '트럼프-젤렌스키 만남 이후 무슨 일이 일어날까?'(Что происходит после встречи Трампа и Зеленского)라는 코너에서 "부다페스트 미-러 정상회담을 준비하는 양국 실무 고위급 회담이 23일 열릴 것이라는 보도가 나왔다"며 "미-러 정상회담이 (상당한) 성과를 거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으며, 앞서 열린 젤렌스키-트럼프 대통령 간의 끔찍한 회동에 대한 서방 언론(특히 영국)의 보도도 이와 관련이 있다"고 전했다. 미국이 러시아와의 포괄적 타협에 반대하는 세력들이 유럽에서 움직이고 있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정상회담을 준비하는 마코 루비오 미 국무장관과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은 이날 전화 통화를 했다. 지난 16일 푸틴-트럼프 대통령이 전화 통화에서 합의한 부다페스트 회담 준비를 위한 구체적이고 건설적인 협의를 가졌다고 한다. 오는 23일 두 장관을 수석으로 하는 고위급 실무회의를 가질 것으로 보도됐다.
외무장관급 실무회의를 갖는다는 것은, 미-러 양국 사이에 갑작스럽게 성사된 8.15 알래스카 정상회담과는 차원이 다르게 준비된다는 의미다. 성사 여부가 아직은 불투명하지만, 두 정상이 실제로 회동한다면, 양국이 주요 쟁점에 대한 합의에 도달했고, 푸틴-트럼프 대통령이 만나 쟁점들을 마무리지을 가능성이 높다. 성과를 기대할 수 있는 정상회담은 원래 이렇게 진행되는 게 상식이다. 젤렌스키 대통령이 푸틴 대통령에게 직접 만나 휴전 협상을 논의하자고 끈질기게 주장하지만, 푸틴 대통령이 이를 거부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미-러 정상회담이 준비되는 과정에서 서방, 주로 영국 언론에서 젤렌스키 대통령의 '외교 참사'에 대한 끔찍한 세부 사항이 점점 더 많이 흘러나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혹시나 있을 지도 모를 트럼프 대통령의 양보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한 의도가 깔린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외교 참사에 대한 미-유럽 언론들의 보도 과정을 보면 얼추 짐작할 수 있다.
미-우크라 정상회담 이후 현장에 있었던 미국 언론의 첫 보도는 트럼프 대통령이 젤렌스키 대통령에게 토마호크 미사일 제공을 사실상 거부하고, 다른 요구 사항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약속을 하지 않으면서 회담이 순탄치 않았다는 정도였다. 가장 야박하게 전한 미 인터넷 매체 악시오스조차 "큰소리는 나오지 않았으나, 토마호크 미사일 논의 과정은 다소 격렬했다", "회담이 2시간 30분 만에 갑작스럽게 끝났다"고 전했다.
미 워싱턴 포스트(WP)도 "(크렘린을 자주 방문한) 스티브 위트코프 미 대통령 특사가 회담에서 젤렌스키 대통령에게 돈바스(도네츠크주와 루간스크주) 주둔 병력의 철수를 촉구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유럽 언론이 전한 팩트와 뉘앙스(어감)는 크게 달라졌다. 예를 들면 영국 파이낸셜 타임스(FT)는 19일 협상에 정통한 유럽 관계자들을 인용해 "트럼프 대통령이 젤렌스키 대통령에게 사실상 욕설을 퍼붓고, 우크라이나 측이 준비한 지도(토마호크 미사일로 러시아 전시경제에 결정적 타격을 줄 목표물 표시/편집자)를 집어던지고, 돈바스에서 군대를 철수하라고 요구하는 등 푸틴 대통령의 주장을 반복했다"고 '폭탄성' 보도를 내놓았다. 영국의 로이터 통신도 같은 내용을 반복했다.
미-영 언론의 차이는 인용한 소식통이 미 백악관과 유럽 국가 고위 인사로 서로 달랐다는 것. 미국 언론은 회담이 끝난 뒤 바로 백악관 소식통을 인용, 보도했을 터이고, 이틀 뒤(19일) FT와 같은 유럽 언론들은 유럽 고위 인사의 전언을 바탕으로 기사를 작성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이 유럽 정상들에게 전한 회담 분위기가 언론을 통해 '감정적'으로 변했다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소위 반(反)트럼프 감정이다.
전쟁 저널리즘(우크라이나 전쟁 3년차, 전쟁 저널리즘. 이진희 저) 차원에서 본 팩트(진실)는 뭘까?
우선, 트럼프 대통령은 영국 언론의 보도가 나온 뒤 젤렌스키 대통령에게 돈바스를 러시아에 넘기라고 압력을 가했다는 의혹을 부인하면서 "위트코프 특사가 군대 철수를 요구했다"고 지적했다. 그는 회담 전에도, 회담에서도, 회담 후에도 "'최전선에서 전쟁을 멈출 것'을 촉구했다"고 설명했다. WP의 보도를 확인해준 셈이다.
미국 언론의 논조도 점차 바뀌기 시작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의 외교 참사가 우크라이나 측에 그 책임이 있다는 주장이 대표적이다. 유럽 언론에 대한 미 언론인들의 자존심이 드러난 순간일 수도 있다.
미 정치 전문 매체 폴리티코의 칼럼니스트 제이미 데트머는 키예프(키이우)가 미 공화당 인사(로비스트)들의 방문 연기나 일정 조정에 대한 조언을 무시했기 때문에, 젤렌스키 대통령의 워싱턴 방문이 '처참하게 실패했다'고 주장했다. 데트머는 "두 정상의 만남은 설사 트럼프 대통령의 입장이 푸틴 대통령과 통화한 후 바꿨더라도, 어느 정도의 성과를 낼 수 있었을 것"이라며 "우크라이나 측이 토마호크 미사일를 고집하다가 F-16 전투기나, 미그 전투기 대응 공대공 미사일과 패트리어트 방공 시스템 등 다른 무기 확보에 집중할 기회를 놓쳤다"고 썼다. 트럼프 대통령이 푸틴 대통령과의 통화한 후, 토마호크 미사일의 판매를 승인하지 않을 게 분명하기 때문에 미 공화당 인사들은 무기 요구의 우선 순위 조정을 건의했으나, 키예프 측이 무시했다는 것. 특히 우크라이나 측은 트럼프 대통령이 회담 당일(17일)에도 토마호크 미사일 자체 비축량에 대한 우려도 표명했는데, 이를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고 그는 비판했다.
우크라이나는 또 정상회담에서 (토마호크 미사일에 과도하게 집작하는) 젤렌스키 대통령의 행동으로 미국으로 하여금 전쟁을 확대하려는 의도로 오해하게 만들었다. 로이터 통신은 "트럼프 대통령 등 서방 측은 우크라이나가 적대 행위의 소강 상태(휴전/편집자)를 틈 타 새로운 공세를 준비할 수 있다는 우려를 표명했다"며 "트럼프 대통령이 회담에서 우크라이나뿐만 아니라 러시아의 안보 보장에 대해서도 논의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 이유"라고 설명했다.
정상회담에 앞서 워싱턴에 온 우크라이나 고위 대표단의 실책도 겹쳤다. 안드레이(안드리) 예르마크 대통령 실장과 율리아 스비리덴코 총리 등은 정상회담을 앞두고 미국의 민관이 추진하는 중요한 몇 가지 협정을 타결하는데 실패했다. 미 공화당 관계자는 폴리티코에 "미국 방위산업체 및 에너지 기업과의 협정이 백악관에서 서명될 예정이었는데, 무산됐다"고 말했다.
또 다른 공화당 외교 정책 자문위원은 "우리는 우크라이나에 젤렌스키 대통령의 방문 연기를 강력히 촉구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스비리덴코 총리 등은 IMF및 세계은행의 연례 회의에 참석해야 하기 때문에 젤렌스키 대통령의 회담을 준비할 시간이 없었다"며 "젤렌스키 대통령의 방문이 일주일 정도 연기됐어야 했다"고 안타까워했다.
FT등 유럽 언론에 인용된 유럽 고위 관리들은 회의에 직접 참석하지 않았다. 젤렌스키 대통령이 회담 직후 유럽 정상들에게 전한 내용에 우크라이나 혹은 유럽 측의 해석이 덧붙여진 것이라고 해야 옳다. 스트라나.ua도 트럼프 대통령 개인에 대해 극히 부정적인 시각이 반영된 것이라고 해석했다.
외신 일부에서는 "푸틴 대통령이 또 트럼프 대통령을 속이고 '굴복시켰다'식의 보도가 나왔다. 젤렌스키 대통령과 그를 지지하는 유럽 정상들이 트럼프 대통령의 현 스탠스(대러 강경 조치 회피, 대우크라 지원 중단, 트럼프식 PURL·나토 자금으로 미국산 무기를 사 우크라이나에 공급하는 방식의 프로그램)에 불만을 품고, 미-러 관계 증진을 막으려는 관점(기준)에서 본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언론도 국익이나 자기 진영을 무시할 수 없기에 어느 편이 마냥 나쁘다고 탓할 수는 없다. 그러나 반트럼프식 일방적인 보도가 우크라이나에 궁극적으로 도움이 될까?
유럽이 현실적으로 대우크라 군사적 지원을 혼자 감당할 수는 없다. 키예프도 트럼프 대통령이 젤렌스키 대통령에게 영토 양보를 압박할 가능성도 있다고 본다. 이를 근본적으로 차단하려면 우크라-유럽은 트럼프 대통령을 러시아와의 전쟁으로 끌어들여야 하는데, "트럼프가 푸틴에게 항복했다"식으로 그의 자존심을 긁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트럼프 대통령을 짜증나게, 또 화나게 한다면, 오히려 역효과를 불러올 수도 있다.

그렇다면 트럼프 대통령의 진정한 속내는 무엇일까?
이론적으로 전쟁의 종식이 제1의 목표라면 위트코프 특사의 주장대로 젤렌스키 대통령에게 돈바스 철군을 요구할 수 있다. 하지만 젤렌스키 대통령은 이를 완강하게 거부하고 있다.
'플랜 B'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혹시 러시아군이 무력으로 돈바스를 점령하도록 내버려두는 게 아닐까? 미국이 우크라이나군에 대한 지원을 지금처럼 줄이고, 러시아 측에 일정한 시간을 준다면 가능한 시나리오다.
푸틴 대통령은 16일 전화통화에서 트럼프 대통령에게 현 전황을 설명했다고 우샤코프 크렘린 보좌관은 밝혔다. 상상해 본다면, 푸틴 대통령이 언제쯤이면 돈바스를 실제로 점령할 수 있고, 점령 즉시 휴전을 발표하겠다고 제안했을 수도 있다. 알래스카 정상회담에서 미-러 정상이 영토의 교환(러시아 미점령 돈바스 땅과 러시아 점령 나머지 지역의 땅을 상호 교환/편집자)에 합의했다는 보도가 사실이라면, 그 다음(B) 플랜으로 푸틴 대통령이든, 트럼프 대통령이든 충분히 시도해볼만한 가치가 있는 거래다.
이진희 기자 jhman4u@buyrussia21.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