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NS 기사보내기
바로가기기사저장
유럽연합(EU)이 조만간 푸틴 대통령과 직접 소통하는 채널을 만들 전망이다. 마리오 드라기 전 이탈리아 총리와 알렉산드르 스투브 핀란드 대통령이 이 채널을 맡을 유력 후보로 거론되고 있다.
우크라이나 매체 스트라나.ua에 따르면 폴리티코 유럽판은 14일 EU가 러시아와의 직통 채널 마련에 관한 논의에 착수했다고 보도했다. 이 매체는 EU 당국자들을 인용, "우크라이나 종전 협상(평화 협상)에서 유럽의 목소리를 공식적으로 대변할 직책을 신설하고, 중량감 있는 인사에게 그 역할을 맡겨야 한다는 의견에 EU 집행위원회와 상당수 회원국이 공감하고 있다"고 전했다. 미국이 주도하는 우크라이나 종전 논의에서 제외될 수 없다는 자구책의 일환인데, 유럽도 대(對)러 강경 일변도에서 대화 국면으로 노선을 바꾸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이 제안을 주도하는 인물은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과 조르조 멜로니 이탈리아 총리다. 두 정상의 주장이 EU 집행위원회와 다른 회원국들로부터 점점 더 지지를 얻고 있다고 폴리티코는 전날(13일) 전한 바 있다.

스트라나.ua는 "유럽은 미국이 자신들 몰래 러시아와 거래를 할 것을 우려해 우크라이나에서 EU의 이익을 대변할 협상가 임명을 요구하고 있다"고 짚었다. 다른 한편에서는 유럽이 푸틴 대통령과 대화를 시작함으로써 그의 특수군사작전(우크라이나 전쟁)을 정당화하게 될 것을 우려하는 지적도 나온다.
유럽의 대(對)러 국면 전환은 마크롱 대통령과 멜로니 총리가 신년 기자회견에서 푸틴 대통령과의 대화 필요성을 강조하고 나서면서 감지됐다. 마크롱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후 푸틴 대통령과 직접 연락을 유지하는 몇 안 되는 유럽 지도자 중 한 명이다. 마크롱-푸틴 대통령 간의 마지막 전화 통화는 지난해(2025년) 7월 1일 성사됐다. 2022년 9월 이후 거의 3년만이었다. 이 전화 통화로 마크롱 대통령은 유럽 내부에서 비판을 받기도 했다.
멜로니 총리는 총리 취임전까지 친(親)러시아 성향을 지닌 이탈리아의 유력 정치인이었다. 그녀가 총선에서 승리하자 유럽 일각에서는 이탈리아의 대(對)우크라 행보에 우려가 제기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는 취임 일성으로 우크라이나 지원을 강조해 그같은 우려는 지워졌다.
우크라이나 전쟁을 둘러싼 지정학적 판도는 지난해 8월 알래스카 미-러 정상회담을 계기로 급격하게 변했다고 봐야 한다. 정상회담을 성사시킨 스티브 위트코프 미 대통령 특사는 이후 크렘린을 이따금씩 찾아 푸틴 대통령과 직접 평화안을 협의했다. 그 내용을 전해들어야 하는 유럽은 심적으로 소외감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트럼프 대통령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우크라이나 평화협상의 최대 쟁점 중 하나인 전후 유럽 안보 구상은 유럽이 전적으로 떠맡아야 한다고 주장하곤 했다. 하지만 유럽에게는 전후 안보 구상을 논의할 한 축인 러시아와의 채널이 막혀 있었다. 푸틴 대통령은 유럽과도 대화와 협상은 늘 열려 있다고 강조했지만, 유럽이 스스로 그 출구룰 막아왔다.
푸틴 대통령은 지난해 12월 "유럽인들이 침묵하고 있다"며 "자신들이 협상에서 배제된 것에 분개하고 있지만, 그들을 배제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들 스스로 배제를 택한 것"이라고 질타했다. 나아가 "그들은 러시아에 전략적 패배를 안겨주겠다는 구상을 받아들였고, 여전히 그런 환상 속에 살고 있는 것 같다"고 꼬집었다. 유럽 정상들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과 자주 만나지만, 모스크바와는 공식적으로 평화 협상을 진행하지 않는 현실을 지적한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유럽도 푸틴 대통령의 의중을 파악하고 우크라이나 전쟁의 출구 전략에 직접 뛰어들어야 한다는 조바심을 느끼는 것 같다.
지난 9일 로마에서 열린 멜로니 총리의 신년 기자회견에서 이같은 분위기가 확인됐다. 그녀는 "유럽이 두 당사자 중 한 쪽(우크라이나)과만 대화한다면 긍정적 역할이 제한될 것"이라며 "러시아와 대화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녀는 그러나 "협상이 무질서한 방식으로 진행되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하면서, "그러한 접근 방식은 유럽이 푸틴 대통령에게 호의를 베푸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마크롱 대통령은 더욱 적극적이다. 그는 지난 7일 프랑스-2 방송과 회견에서 몇 주안에 푸틴 대통령에게 다시 전화할 의향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는 우크라이나의 방어 노력을 계속 지원해야 한다"고 전제하면서도 대화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그는 "푸틴 대통령과 소통 체계를 구축하는 것이 필요하다"며 "소통 채널을 재정비하는 작업이 진행 중"이라고 공개했다.

그리고 이튿날(8일)에는 러시아가 간첩혐의를 받고 있는 프랑스 연구원 로랑 비나티에를 러시아 농구 선수 카사트킨과 맞교환했다고 발표했다. 러시아 연방보안국(FSB) 언론 서비스는 이날 "1976년생 프랑스인 비나티에는 스위스 비정부 비영리 단체인 인도주의 대화 센터의 직원으로서 러시아에서 군사 및 군사 기술 정보를 수집했다"며 "푸틴 대통령으로부터 사면을 받고 석방됐다"고 밝혔다. 비나티에는 '외국 에이전트'로 러시아 정부에 등록하지 않고, 군사 정보를 수집한 혐의로 3년형을 선고받았으나, 지난해 8월 간첩 혐의로 새로 기소됐다.
그와 맞교환된 카사트킨은 지난해 7월 미국의 요청으로 프랑스 샤를 드골 공항에서 체포됐다. 미국은 그가 해킹 '랜섬웨어' 조직에 연루됐다고 주장했다. 그의 변호인은 그러나 "카사트킨은 미국에서 중고 컴퓨터를 구입했을 뿐이며, 그 컴퓨터가 사건에 연루되었다"고 해명했다.
러-프랑스 정상 간 대화는 지난해 12월부터 감지됐다. 마크롱 대통령이 지난해 12월 19일 EU 정상회의 직후 "미국만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문제를 협상하는 것은 안된다"며 "푸틴 (대통령)과 대화하는 것이 다시 필요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드미트리 페스코프 러시아 대통령실 대변인은 "푸틴 대통령이 마크롱 대통령과의 대화 준비가 되어 있다"고 화답했다. 페스코프 대변인은 "상호 정치적 의지가 있다면 마크롱 대통령의 발언은 긍정적으로 평가될 수밖에 없다"며 이같이 말했다. 프랑스 대통령실은 다른 유럽 국가들의 우려를 의식해 "러시아와의 모든 대화는 젤렌스키 대통령과 유럽 동맹국 모두에게 '완전히 투명한 상태'에서 진행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러시아와 대화를 위한 소통 창구가 EU만을 대표할지, 영국 등 우크라이나를 지원하는 서방 국가들의 모임인 '의지의 연합' 전체를 대표할지 아직 불분명하다. 또 특사 직책을 외교관 등 관료에게 정식으로 맡길지 아니면 전현직 국가 지도자에게 비공식적으로 역할을 부여할지 등 구체적인 사항도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다만, 푸틴 대통령을 상대하려면 전문 외교관이나 관료보다는 유럽 안팎에서 명망이 높은 '거물급'이어야 한다는 쪽에 무게가 실리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관련, 이탈리아 정부의 실세로 꼽히는 조반바티스타 파촐라리 총리실 차관은 유럽중앙은행(ECB) 총리를 지낸 마리오 드라기 전 이탈리아 총리가 특사를 맡아야 한다고 최근 주장했다. 우크라이나 출신의 아내를 둔 파촐라리 차관은 이탈리아 연정 내에서 우크라이나 지지 여론을 형성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해왔다.

EU 외교관들은 폴리티코에 알렉산데르 스투브 핀란드 대통령이 미국과 러시아 사이에서 유럽을 대표할 수 있는 인물로 자주 거론돼 왔다고 말했다. 골프 선수에서 외교관으로 전향한 이색적인 경력의 소유자인 스투브 대통령은 트럼프 대통령과 골프를 치며 친밀한 관계를 쌓아온 데다 핀란드가 러시아와 국경을 맞댄 국가라는 점에서 적임자로 꼽힌다.
이진희 기자 jhman4u@buyrussia21.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