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Apr 2026

1989년 강수연에서 2026년 《기이한 생각의 바다에서》까지, 모스크바국제영화제와 한국영화의 인연

사진설명 : 단편영화 부문 ‘은빛 성 게오르기상’을 수상한 안혜린 감독 (사진 출처 : 타스통신)

모스크바국제영화제에서 한국영화의 수상이 두드러졌다. 올해 제48회 모스크바국제영화제는 4월 16일부터 23일까지 모스크바에서 열렸다. 올해 한국영화의 존재감은 한두 편의 초청작으로 끝나지 않았다. 조현서 감독의 《겨울의 빛( Winter Light)》과 김진유 감독의 《흐르는 여정(Journey There)》이 장편 경쟁 부문에 올랐다. 최정단 감독의 다큐멘터리 《기이한 생각의 바다에서(In the Sea of Strange Thoughts)》는 다큐멘터리 경쟁 부문에 초청됐고,  《정동(Nowhere, Somewhere)》도 단편 경쟁 부문에서 한국 작품으로 소개됐다.

특히 《기이한 생각의 바다에서》는 올해 영화제에서 특별한 성취를 이뤘다. 한국 인문학계 원로 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의 삶과 사유를 다룬 이 작품은 다큐멘터리 경쟁 부문에서 심사위원 특별상과 러시아 다큐멘터리 영화·TV 길드상을 받았다. 심사위원단은 작품의 시적 아름다움과 이미지의 철학적 깊이를 평가했고, 러시아 다큐멘터리 영화·TV 길드는 이 작품을 “육체의 연약함을 극복한 정신의 승리”로 읽었다. 2026년 모스크바영화제의 복원 고전 섹션에는 임권택 감독의 《아제아제 바라아제》, 《춘향뎐》, 《서편제》가 함께 올랐다. 그중 《아제아제 바라아제》는 1989년 강수연에게 모스크바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안긴 작품이다. 2026년 모스크바는 현재의 한국 독립영화와 다큐멘터리를 초청하는 동시에, 한국영화와 모스크바의 첫 강한 인연이었던 1989년의 기억까지 끄집어낸 것이다.

한국영화와 모스크바국제영화제의 인연은 198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강수연은 임권택 감독의 《아제아제 바라아제》로 모스크바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이미 1987년 베니스영화제에서 《씨받이》로 세계 무대에 이름을 알린 강수연은 2년 뒤 모스크바에서도 수상하며 한국 배우가 국제영화제에서 인정받은 사례였다. 그다음 중요한 배우는 이덕화다. 그는 1993년 《살어리랏다》로 모스크바국제영화제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2017년 손현주는 《보통사람》으로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2003년 장준환 감독은 《지구를 지켜라》로 감독상을 받았다. 이 작품은 한국 장르영화의 기괴한 상상력과 사회적 불안을 한꺼번에 담은 영화였다. 모스크바는 이 낯선 새로운 세대가 가진 독창성에 후한 점수를 줬다

이 흐름은 2013년에 다시 이어졌다. 정영헌 감독의 《레바논 감정》은 모스크바국제영화제에서 감독상에 해당하는 ‘Silver George Award’를 수상했다. 2010년대 중반 이후 모스크바가 주목한 한국영화의 성격은 더 뚜렷해졌다. 대형 상업영화보다 독립영화, 단편, 다큐멘터리 장르가 두드러졌다. 2015년 김윤하 감독의 《저격수의 관찰법》은 단편 경쟁 부문 최우수상을 받았다. 2016년에는 김종관 감독의 《최악의 하루》가 국제영화비평가연맹상을 받았고, 윤재호 감독의 《마담 B. 어느 탈북 여성의 이야기》는 다큐멘터리 경쟁 부문 Silver George를 받았다.

2017년에는 손현주가 《보통사람》으로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이 영화는 1980년대 한국 군사정권 시기를 배경으로 한 작품이다. 모스크바는 이 작품을 통해 한국 현대사의 어두운 정치적 시간과 그 안에서 흔들리는 보통 사람의 얼굴을 읽었다. 같은 작품은 NETPAC상도 받았다. 2020년에는 정관조 감독의 다큐멘터리 《녹턴 / Nocturne》이 다큐멘터리 경쟁 부문 Silver George를 받았다.

모스크바국제영화제가 한국영화를 읽어온 방식은 비교적 분명하다. 모스크바 영화제에서 한국영화는 산업형 콘텐츠의 주제에서는 먼 여성의 고통, 가족의 균열, 분단과 이주, 죽음과 질병, 사회적 폭력, 개인의 상처를 다룬 작품들이었다. 강수연의 《아제아제 바라아제》에서 윤재호의 《마담 B.》, 정관조의 《녹턴》, 최정단의 《기이한 생각의 바다에서》까지 이어지는 선은 바로 그 지점에서 만난다.

물론 오늘의 모스크바국제영화제를 둘러싼 국제적 환경은 예전과 다르다. 러시아와 서방의 정치적 긴장,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의 문화 교류 위축, 주요 서구 영화사의 러시아 시장 이탈은 영화제의 위상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그럼에도 영화제는 계속 열리고 있고, 한국영화는 그 안에서 여전히 자리를 잡고 있다. 2026년의 한국영화 초청과 수상은 그래서 단순한 영화제 소식 이상이다.

1989년 강수연의 수상은 한국영화가 모스크바에 처음 강하게 각인된 순간이었다. 2026년의 모스크바는 그 기억을 다시 꺼내 들었다. 임권택의 영화들을 복원 고전으로 상영했고, 한국 독립 장편 두 편을 경쟁 부문에 올렸으며, 한국 인문학 다큐멘터리에 상을 주었다. 모스크바가 본 한국영화는 여전히 작고 조용한 쪽에 가깝다. 그러나 그 조용함은 약하지 않다.

한국영화는 모스크바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다른 방식으로 남았다. 배우의 얼굴로, 독립영화의 불안으로, 다큐멘터리의 긴 호흡으로, 그리고 한 사상가의 삶을 따라간 카메라의 시선으로 남았다. 1989년의 강수연에서 2026년의 《기이한 생각의 바다에서》까지, 모스크바국제영화제는 한국영화가 러시아 관객과 만나는 오래된 통로였다. 그리고 올해, 그 통로는 다시 열렸고 관객들은 환호했다.

최승현 에디터 buyrussia21@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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