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 Jul 2026

에따 라시아2: 러시아 귀족은 왜 프랑스어를 썼을까?

러시아 귀족들은 한때 러시아어보다 프랑스어를 더 세련된 언어로 여겼다. 이것은 단순한 외국어 유행이 아니었다. 계급의 문제였다. 취향과 권력 자기 정체성의 문제였다. 18세기 러시아 상류층에게 프랑스어는 말이 아니라 일종의 표식이라고 봐야한다. 나는 농민이 아니다. 나는 지방 귀족이 아니다. 나는 유럽을 아는 사람이다. 이런 식의 사회적 암호였다.

레프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가 프랑스어 대화로 시작되는 것은 그래서 우연이 아니다. 소설 첫머리의 상트페테르부르크 살롱은 러시아 땅 위에 있지만, 공기는 파리 쪽에 가깝다. 귀족들은 프랑스어로 인사하고 농담하고 감정을 표현했다. 러시아 제국의 수도에 모여 앉아 있으면서도 그들은 러시아어를 촌스럽게 여겼다. 톨스토이는 이 장면을 통해 한 시대의 모순을 보여준다. 러시아 귀족은 러시아를 지배했지만, 러시아어로 자기 자신을 설명하는 데에는 서툴렀다. 《전쟁과 평화》의 프랑스어 사용은 당시 러시아 귀족 사회의 현실을 반영하는 척도로 작용한다. 

이 흐름의 출발점에는 표트르 대제가 있었다. 표트르는 러시아를 서유럽식 국가로 바꾸려 했다. 그는 군대만 고친 것이 아니었다. 관료제와 복식, 예절, 교육, 도시, 귀족의 몸가짐까지 바꾸려 했다. 수염을 자르게 하고, 유럽식 옷을 입히고, 젊은 귀족들을 해외로 내보냈다. 러시아의 낡은 보야르 문화(표트르 대제 이전 러시아 귀족층의 전통적 생활양식과 권력 문화. 보야르Boyar, 러시아어 боярин는 중세 루시와 모스크바 대공국, 초기 러시아 차르국에서 활동한 최고 귀족층을 의미함 서유럽식 귀족이라기보다는 차르 주변에서 토지·군사·행정 권력을 가진 오래된 귀족 가문)는 뒤로 밀렸다. 서유럽이 기준이 됐다. 그 순간 외국어는 단순한 기술이 아니었다. 출세의 도구였다. 궁정에 들어가기 위한 장비였다. 표트르의 서구화 정책은 러시아 귀족층이 유럽식 생활양식을 받아들이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표트르 대제 이전 러시아 귀족층의 전통적 생활양식과 권력 문화. 보야르Boyar, 러시아어 боярин는 중세 루시와 모스크바 대공국, 초기 러시아 차르국에서 활동한 최고 귀족층을 의미함. 사진출처 : br21

그런데 왜 독일어가 아니라 프랑스어였을까. 이유는 분명하다. 당시 유럽의 문화 중심이 프랑스였기 때문이다. 루이 14세 이후 프랑스 궁정은 유럽 귀족 문화의 표준이 됐다. 외교, 사교, 문학, 연극, 옷차림, 연애 말투까지 프랑스가 기준점이 됐다. 프랑스어는 라틴어를 밀어내고 유럽 상류층의 공용어가 됐다. 특히 정확하고 우아하며 외교에 적합한 언어라는 이미지도 한몫했다. 리슐리외 추기경이 1635년 프랑스 아카데미를 공식화한 것도 중요했다. 언어를 국가가 관리하고 표준을 만들고 권위를 부여했다. 프랑스어는 그렇게 단순한 말에서 문명의 형식으로 올라섰다.

러시아 귀족은 그 형식을 탐냈다. 그들은 프랑스어를 배운 것이 아니라 프랑스식 인간이 되려 했다.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프랑스인 가정교사에게 교육받았다. 춤, 펜싱, 편지 쓰는 법은 물론 여성을 대하는 법도 배웠다. 식탁에서 포크를 드는 방식, 무도회에서 고개를 숙이는 각도, 감정을 표현하는 어휘까지 프랑스식이었다. 러시아 귀족 가문 안에 작은 프랑스가 들어와 있었던 것이다. 

예카테리나 2세 시대에는 이 경향이 더 강해졌다. 예카테리나는 독일 출신이었지만 자신을 유럽 계몽군주의 일원으로 보이고 싶어 했다. 그녀는 볼테르, 드니 디드로, 장 르 롱 달랑베르 같은 프랑스 계몽사상가들과 교류했다. 러시아의 황제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앉아 있었지만, 자신의 지적 권위를 파리의 철학자들에게서 확인받고 싶어 했다. 예카테리나의 서신은 프랑스 계몽주의자들과의 사상적·정치적 교류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료로 남아 있다.

여기서 러시아 귀족 사회의 콤플렉스가 드러난다. 러시아는 강했다. 영토는 넓었고 군대도 컸다. 그러나 문화적 자의식은 불안했다. 서유럽은 러시아를 반쯤 야만의 나라로 보고 있었다. 러시아 귀족은 그 시선을 의식했다. 그래서 더 세게 프랑스어를 붙잡았다. 프랑스어를 한다는 것은 ‘우리는 야만이 아니다’라는 항변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 저항은 동시에 자기 부정이었다.  러시아어를 버리고 프랑스어로 말할수록, 그들은 러시아 안에서 더 낯선 사람이 돼갔다.

프랑스 대혁명은 이 흐름에 또 다른 연료를 부었다. 1789년 혁명 이후 프랑스 귀족과 왕당파 인사들이 유럽 각지로 흩어졌다. 그중 상당수가 러시아로 들어왔다. 러시아 제국은 혁명을 혐오했다. 차르 체제에 혁명은 질병이었다. 하지만 혁명에 쫓겨난 프랑스 귀족들은 환영했다. 그들은 러시아 귀족 가문의 가정교사가 되었고, 궁정과 지방 영지에 프랑스식 예절을 퍼뜨렸다. 프랑스에서는 무너진 구체제가 러시아 귀족의 응접실 안에서 다시 살아난 것이다. 러시아는 혁명 프랑스를 싫어했지만, 혁명 이전의 프랑스는 사랑했다. 이 모순이 당시 러시아 귀족 문화의 정체였다.

프랑스어는 그렇게 러시아 상류층의 내부 언어가 되었다. 공문서와 군대, 행정의 언어는 러시아어였다. 그러나 감정과 사교의 언어는 프랑스어였다. 연애편지, 무도회, 살롱, 문학적 농담, 철학 토론을 그들은 프랑스어로 했다. 알렉산드르 푸시킨도 예외가 아니었다. 푸시킨은 현대 러시아 문학어의 창시자로 불리지만, 그의 편지 780여 통 가운데 약 5분의 1인 163통이 프랑스어로 쓰였다는 연구가 있다. 러시아어를 새롭게 만든 시인조차 프랑스어의 그늘 안에서 성장한 것이다.

이 대목이 중요하다. 프랑스어는 러시아 문학을 죽인 것이 아니다. 오히려 러시아 문학을 자극했다. 외국어의 압력이 있었기 때문에 러시아어는 자기 근육을 키워야 했다. 프랑스어가 감정과 사교의 세련된 언어라면, 러시아어도 그만큼 깊고 복잡한 감정을 표현할 수 있어야 했다. 푸시킨은 그 일을 해냈다. 그는 고상한 교회슬라브어와 민중의 러시아어, 유럽식 문체를 섞어 새로운 러시아 문학어를 만들었다. 그러니까 프랑스어 열풍은 러시아어의 굴욕이었지만, 동시에 러시아어가 강해지는 계기이기도 했다.

그러나 전쟁이 오자 상황은 달라졌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1812년 러시아를 침공했다. 어제까지 세련됨의 상징이던 프랑스어가 하루아침에 적국의 언어가 되었다. 귀족 장교들은 곤란해졌다. 그들은 프랑스어를 너무 잘했다. 어떤 이들은 러시아어 억양도 어색했다. 농민과 병사들의 눈에는 그들이 수상해 보일 수밖에 없었다. 러시아 땅에서 러시아 군복을 입고 있는데 말투는 프랑스 쪽이었다. 데니스 다비도프는 당시 농민들이 러시아어가 서툰 귀족 장교들을 프랑스인으로 오해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회고했다. 언어는 더 이상 취향의 문제가 아니었다. 목숨의 문제가 되었다.

1812년 조국전쟁은 러시아 귀족 사회에 거울을 들이댔다. 러시아를 위해 싸우는 귀족들이 정작 러시아어로 러시아 민중과 자연스럽게 말하지 못했다. 이보다 더 선명한 모순은 없다. 프랑스어는 품위였지만 동시에 단절이었다. 귀족과 농민 사이의 거리였다. 궁정과 마을 사이의 벽이었다. 살롱과 전쟁터 사이의 균열이었다.

전쟁 이후 분위기는 바뀌었다. 러시아어를 되찾자는 목소리가 커졌다. 알렉산드르 시시코프는 프랑스어 남용이 러시아어를 망친다고 비판했다. 알렉산드르 그리보예도프는 희극 《지혜의 슬픔》에서 프랑스식 허영에 취한 러시아 귀족들을 비틀었다. 이제 프랑스어는 더 이상 무조건적인 교양이 아니었다. 과잉된 모방과 비굴한 취향 게다가 자기 언어를 잃어버린 계급의 징표로도 읽히기 시작했다.

러시아 귀족은 그 형식을 탐냈다. 그들은 프랑스어를 배운 것이 아니라 프랑스식 인간이 되려 했다.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프랑스인 가정교사에게 교육받았다.사진 출처 : br21

물론 프랑스어는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언어는 칼로 자르듯 정리되지 않는다. 러시아어 안에는 프랑스어에서 온 말들이 그대로 남았다. афиша, 즉 아피샤는 포스터나 공연 안내문을 뜻한다. пресса, 프레사는 언론이다. шарм, 샤름은 매력이다. кавалер, 카발레르는 여성의 남성 파트너를 뜻한다. 메뉴, 살롱, 발레, 부티크 같은 말들도 러시아어 안에서 자연스럽게 굳었다. 유행은 지나갔지만 어휘는 남았다. 필요 없는 허영은 죽었고, 필요한 단어는 살아남았다.

결국 러시아 귀족의 프랑스어 열풍은 한 시대의 자기 분열이었다. 그들은 러시아를 지배했지만, 유럽을 동경했다. 러시아 땅에서 살았지만, 프랑스어로 자신을 꾸몄다. 러시아 민중 위에 군림했지만, 러시아 민중의 언어와는 멀어졌다. 그 간극이 19세기 러시아 문학의 거대한 질문이 되었다. 우리는 과연 누구인가?  유럽인가? 아니면 러시아인가?

이 질문 위에서 러시아 문학은 자랐다. 푸쉬킨은 러시아어를 문학의 언어로 세웠다. 톨스토이는 프랑스어로 말하는 귀족들을 러시아 역사의 한복판에 세워 그들의 허영과 불안을 드러냈다. 도스토옙스키는 서구 사상에 매혹되고 찢겨나간 러시아 지식인의 내면을 파고 들었다. 그러니까 프랑스어의 시대는 단순한 외국어 유행의 역사가 아니다. 러시아가 자기 언어를 되찾기 전 남의 언어로 자신을 증명하려 했던 시대의 기록이다.

프랑스어는 러시아 귀족에게 창문이었다. 유럽을 보는 창문인 동시에 거울이었다. 자기 얼굴이 얼마나 낯설어졌는지 보여주는 거울. 그리고 1812년 전쟁 이후 그 거울은 깨졌다. 깨진 자리에서 러시아어가 올라왔다. 느리고 거칠고 무겁지만, 자기 땅의 언어였다. 그때부터 러시아는 남의 문명으로 자신을 설명하는 대신, 자기 언어로 세계와 맞서기 시작했다.

최승현 에디터 buyrussia21@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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