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위기를 촉매재로 삼아 한-미 양국의 최고위층에서 벌어지는 카지노 자본주의, 국가 권력이 금융시장의 핵무기 격인 파생상품으로 '잭팟'을 노리는 거대한 음모를 담은 본격 추리 소설 '데칼코마니-신들의 화폐'를 작가의 양해를 얻어 연재한다.
☜이 소설은 한반도 위기를 모티브로 한 가상의 추리 소설이며, 등장 인명·지명·기관·사건 등은 사실과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데칼코마니 신들의 화폐 -제 7화 생각의 오류]에서 계속
[데칼코마니 신들의 화폐 -
제 8화 검은 카운트다운]
월요일 아침. 칼로스가 사무실에 들어서자, 늘씬한 몸매에 금발의 귀여운 여직원이 환하게 웃으며 그녀를 맞이했다.
“좋은 아침이에요!”
밝게 인사한 직원은 칼로스의 사촌 여동생, 크리스티나였다. 대학을 졸업하고 가수가 되겠다며 요란을 떨던 그녀를, 칼로스는 높은 연봉으로 불러들였다.
크리스티나는 밝고 귀여웠다. 누구에게나 해맑게 웃었다. 그녀는 사람의 경계심을 낮추는 재주가 있었다.
칼로스는 그런 그녀를 볼 때마다 아주 오래된 기억 하나를 떠올렸다.
어린 시절의 칼로스는 귀엽고 예뻤으며, 착하고 총명했다. 외동딸이었던 그녀는 부모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그러나 그녀가 다섯 살이 되던 해, 부모는 이혼했고 곧바로 각자의 삶을 찾아 떠났다. 재혼도 빨랐다.
그날 이후, 어린 칼로스는 6개월마다 양쪽 집을 오가며 새 부모의 눈치를 살피는 삶에 익숙해져야 했다.
어느 집에서도 완전히 사랑받지 못했다.어느 식탁에서도 편히 웃지 못했다.
그 아이가 일곱 살이던 어느 겨울이었다. 유난히 매서운 바람이 휘몰아치던 날이었다.
아이의 어머니는 예쁜 아기 곰 인형을 아이에게 안겨 주고는 여행을 떠나자고 했다. 신바람이 난 아이는 어머니의 손을 꼭 잡고 집을 나섰다.
그러나 도착한 곳은 여행지가 아니었다. 크리스티나의 아버지, 그러니까 아이의 삼촌 집이었다. 어머니는 크리스티나에게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그리고 웃는 얼굴로 어린 딸의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우리 딸, 여기 잠깐만 있어. 엄마가 금방 올게.”
그것이 아이가 기억하는 어머니의 마지막 목소리였다.
그날 이후, 아이는 어머니의 마지막 말을 매일 되새기며 기다렸다.
잠깐만. 금방. 그 말들은 처음에는 희망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희망은 상처가 되었고, 원망이 되었다.
아이는 어느 날 아기 곰 인형을 끌어안은 채 현관문 앞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바깥에는 눈이 소복이 쌓이고 있었다. 어머니가 문 앞에서 남기고 간 마지막 말이 여전히 귓가를 울렸다.
‘엄마가 금방 올게.’
아이는 누군가의 말을 믿지 않는 법을 아직 배우지 못한 나이였다. 그러나 결국 어머니는 돌아오지 않았다.
아이는 매일 밤 아기 곰 인형에게 속삭였다.
“금방이… 이렇게 긴 거야?”
대답은 없었다.
“엄마가 내일은 오겠지?”
대답 없는 인형만이 아이의 곁을 지켰다.
그 간절한 기다림은 결국 영원이 되었다.
그리고 중학교 3학년이 되던 해, 칼로스는 마침내 아기 곰 인형을 버렸다.
그 후 ‘잠깐만’과 ‘금방’이라는 단어는 그녀에게 버림받은 기억을 몰고 오는 금기어가 되었다. 그녀는 그 단어들을 단 한 번도 입에 올리지 않았다.
그 금기는 평생 이어졌다. 이후 누군가가 그 말을 입에 담는 순간, 그녀의 등골에는 어김없이 얼음 같은 전율이 올라왔다. 그 아이에게 그 말들은 약속이 아니었다.
버림의 선고였다.
얼마 뒤, 삼촌 집에 아기가 태어났다.
이름은 크리스티나였다.
그 아이를 바라보는 숙모의 얼굴은 언제나 미소 그 자체였다. 어린 칼로스는 그 미소를 본 순간 깨달았다.
저건 자신에게는 절대 주어지지 않을 종류의 미소라는 것을.
숙모가 두 아이를 대하는 말투도 늘 달랐다. 칼로스는 처음으로 질투라는 감정을 배웠다.
숙모가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
부담. 경계. 귀찮음.
그 어디에도 따뜻한 것은 없었다.
그 아이는 숙모의 따가운 눈총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다. 어린 마음에도 한 가지는 분명히 결심했다.
‘나는 크리스티나랑 달라야 해.’
그 결심은 점점 더 단단해졌다.
‘달라져야 난 살아.’
그 결심은 그녀의 유년기를 지배했다.
다행히 그녀에게는 탈출구가 있었다.
책. 그리고 학업이었다.
숙모의 시선이 차갑게 내려앉을 때마다, 삼촌의 무관심이 그녀의 등을 밀어낼 때마다, 그녀는 책상 앞에 앉았다.
온 세상에 홀로 남겨진 듯한 깊은 외로움, 쇳덩이처럼 무거운 우울함이 그녀를 덮칠 때마다, 그녀는 책장을 열었다. 책만은 그녀를 버리지 않았다.
책 속의 세계에서만큼은 외롭지 않았다.
그녀는 누구보다 빨리 이해했고, 누구보다 빨리 외웠다.
누구보다 정확하게 문제를 풀었다.
선생님들은 감탄했다.
“저 아이는 천재야.”
그 말은 그녀의 생애 최초의 인정이었다.
그리고 그 한마디가 그녀를 지탱했다.
‘그래. 이 세상에서 나를 선택한 건 오직 책과 공부뿐이야.’
그때부터 그녀의 심장은 애정이 아니라 성취감으로 뛰기 시작했다. 타고난 머리 덕에 그녀는 천재라고 불리며 하버드에 수석으로 입학했다.
그녀는 자신이 새로운 세계에 들어왔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시련은 끝나지 않았다.
대학에서 만난 남자친구는 그녀의 미모만 사랑한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똑똑함을 진짜로 존중해 주는 듯 보였다.
처음이었다.
누군가가 자신을 부담이 아니라 매력으로 본다는 느낌.
처음이었다.
따뜻한 감정의 느낌, 사랑이라는 단어를 떠올린 것은.
어느 날 그녀는 그에게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난… 사람을 사랑하는 게 익숙하지 않아.”
그는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 난 언제나 네 곁에 있을 거야. 절대로 혼자 두지 않을게.”
그러나 그해 시험이 끝나고 겨울방학이 시작되자, 그는 말없이 자취를 감췄다. 전화도 없었다. 편지도 없었다. 설명도 없었다.
그녀는 깨달았다.
사람은 결국 떠난다는 것을.
그날 이후, 그녀의 마음은 완전히 굳어졌다.
‘내 인생에서 사람은 필요 없어.’
그녀는 차갑게 결심했다.
‘내게 필요한 건 영원한 성공뿐이야.’
그 무렵부터 그녀의 도피처가 된 것은 오직 돈이었다. 존재 이유 역시 돈을 모으는 일이었다. 통장에 찍힌 숫자만이 그녀의 친구이자 연인이며, 부모였다.
돈에 대한 그녀의 집착은 점점 광기에 가까워졌다.
칼로스가 자리에 앉았을 때, 이십 대 중반의 남자 직원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주말 잘 보내셨습니까?”
그는 미셸 티모였다.
BR사에서 근무하던 인재였으나, 칼로스가 제안한 두 배의 연봉을 받고 이곳으로 옮겨 왔다. 업무 능력은 출중했고, 무엇보다 입이 무거웠다.
그는 외교관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중국과 한국에서 자랐다. 중국어와 한국어를 원어민처럼 구사했고, 아시아 시장의 정보 수집과 매매를 도맡고 있었다.
크리스티나와 미셸이 나란히 앉았다.
곧 사무실 벽면을 가득 메운 수십 대의 모니터가 동시에 점등했다. 차트들은 서로 다른 파동으로 분초마다 출렁였다.
뉴욕. 런던. 도쿄. 서울.
전 세계 시장의 흐름이 한 공간에 응축되어 있었다.
미셸이 한 화면을 가리켰다.
“여길 보십시오.”
그의 손끝이 가리키는 화면에서 캔들 차트의 봉들이 미친 듯이 솟구치고 곤두박질쳤다.
유럽 시장의 주식 매도세가 아시아 증시를 끌어내리고 있었다.
주식과 금, 석유 선물의 급락이 뉴욕 지수의 곡선을 뒤흔들었다. 서로 다른 시장들이 하나의 리듬으로 얽히고 있었다. 마치 거대한 오케스트라 같았다.
칼로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만기 D-5. KOSPI200 콜 20,000계약 롤업. NDF 원화 3개월 숏, 유럽 개장 15분 전 언와인드.”
그녀의 목소리는 차갑고 정확했다. 체결음이 연속으로 울렸다.
차트가 짧게 떨렸다.
KOSPI200 선물이 30초간 스텝을 밟듯 오르내렸고, 거래량이 한 번 팽창했다가 꺼졌다.
스프레드가 벌어졌다가 다시 원 위치했다.
크리스티나와 미셸의 손끝에서 수십억 달러가 대륙을 가로질러 이동했다. 칼로스의 미세한 손짓 하나에 아시아 금융 시장이 뒤흔들렸다.
지구촌은 그들의 모니터 앞에서 하나의 그래프로 축소되었다.
인간의 탐욕과 공포는 단 몇 초 만에 차갑고 검은 숫자로 환산되었다.
세계의 금융 시장.
언제나 그곳에는 개미귀신들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들은 개미 사냥을 위해 저마다 모래를 파내며 함정을 팠다.
개미들에게는 뉴스의 파도가 길을 안내했다. 유튜브가 손을 내밀었다. 전문가의 목소리가 확신을 주었다.
‘이번엔 다르다.’
그 믿음이 또다시 그들의 등을 떠밀었다.
결국 모래는 다시 무너졌다. 발버둥을 쳐 보지만, 더 깊이, 더 빠르게 함몰된다. 그곳은 이미 오래 전에 설치된 개미들의 지옥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투기꾼이 아니었다.
어떻게든 하루하루를 버텨 내며, 조금이라도 더 나은 삶을 꿈꾸는 성실한 사람들이었다. 가진 것이라곤 피땀으로 모은 작은 돈뿐이었다.
그 돈에 작은 소망을 담았다.
아이의 학비. 부모의 병원비. 은퇴 후의 월세.
언젠가 작은 집 하나.
그들은 그렇게 금융 시장에 들어왔다.
미셸의 낮고 단호한 목소리가 방 안을 메웠다.
“개미들은 지금도 매수 버튼을 누르고 있습니다.”
세계는 그들의 차트 위에서 격렬히 요동쳤다. 거대한 금융의 파도가 그들의 손가락 끝에서 조율되고 있었다.
그들은 만반의 준비를 마친 뒤, 카운트다운의 그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칼로스는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
모니터 속 차트들이 숨 가쁘게 꿈틀거렸다.
빨간 선과 파란 선의 파동은 사람보다 더 냉정했고, 더 잔혹했다.
하지만 누구보다 정직하고 솔직했다.
그녀는 낮게 속삭였다.
‘내 곁에 남는 건 오직 숫자뿐.’
모니터의 빛이 그녀의 눈동자에 번졌다.
‘숫자는 나를 버리지 않아.’
어머니가 떠났던 그 겨울, 아기 곰 인형만이 그녀의 품에서 마지막까지 버텼다. 그러나 세상은 결국 그마저도 내려놓게 했다.
그날 이후, 그녀는 아무것도 품지 않았다.
그 어떤 인형도, 그 어떤 사람도.
그 어떤 감정도.
칼로스는 손을 들어 공중에서 허공을 짚었다.
터치스크린이 반응하며 그래프가 확대되었다.
기업 실적, 유가, 금리, 환율, 모든 지표가 그녀의 손끝에서 살아 움직였다.
사람은 감성으로 움직이고, 돈은 법칙으로 움직인다.
사람을 믿는 건 도박이지만, 돈을 믿는 건 수학이었다.
그녀는 도박보다 수학을 선택한 여자였다.
모니터의 불빛이 그녀의 눈동자에 번졌다. 그 눈빛은 얼음처럼 맑았지만, 차가웠다.
‘난 높이 올라가야 한다.’
그녀의 손가락이 키보드를 가볍게 두드렸다. 새로운 계좌가 열렸고, 투자 포지션이 겹겹이 쌓였다.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자리까지.’
그녀의 모든 행동에는 일관된 목표가 있었다.
영원한 성공. 영원한 행복이었다.
그녀에게 그것은 모니터 속에 깊이 찍힌 두껍고 묵직한 숫자였다.
‘잠깐’과 ‘금방’을 외면한 소녀는, 이제 영원을 증명하려는 여인이 되었다.
그러나 숫자는 언제나 진실을 말해 주지 않았다.
왜곡된 진실은 늘 값비싼 대가를 요구했다.
하지만 칼로스의 미소는 계산된 듯 차가웠다. 누구에게도 굴하지 않겠다는 은밀한 자존심이 그녀의 내면 깊숙이 불타고 있었다.
그녀는 프롬펠과의 공생 관계를 유지했지만, 생리적으로 그가 싫었다.
최소한 자신은 그처럼 교활하고 탐욕스럽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침을 질질 흘리며 먹이를 찾아 헤매는 늙은 하이에나.’
그녀가 프롬펠에게서 받는 느낌은 오직 그것뿐이었다.
끔찍함. 혐오감. 그리고 역겨움.
그녀는 자신은 전혀 그를 닮지 않았다고 믿었다.
그러나 사람이란 결국 데칼코마니였다.
그녀 역시 자신 안에 또 하나의 다른 나를 품고 살아가고 있었다.
한쪽은 정의를 추구하지만, 다른 한쪽은 욕망을 쫓는다.
그런 그녀의 입가에 야릇한 미소가 스쳤다.
프롬펠로부터 정보를 받으면, 그녀는 먼저 자신의 자금으로 투자했다.
그 다음 프롬펠의 자금으로 한 번 더 베팅했다. 이어 글로벌 자산 운용사에 은밀히 귀띔해 주고, 그들로부터 고정급과 성과급, 두 몫을 챙겼다.
그녀는 프롬펠의 권력을 지렛대 삼아 판을 설계했다.
그리고 BR과 SM을 움직여 거대 자본을 끌어 모으고, 금융의 혈관을 하나씩 장악해 나갔다.
마침내 시장이 과열되었다.
이른바 개미 투자자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들이 벌 떼처럼 몰려드는 순간, 그녀는 단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출구를 열었다.
남는 것은 그녀와 그들의 천문학적 수익.
그리고 빠져나오지 못한 개미들의 참혹한 손실.
그 모든 것은 계산된 설계였고, 준비된 함정이었다.
판은 처음부터 그렇게 짜여 있었다.
모든 투자자의 탐욕은 그녀에게 손쉬운 먹잇감이었다.
이런 사이클은 인류가 종말을 맞이하지 않는 한 예외 없이 반복되는, 강자가 약자를 약탈하는 영겁의 고리였다.
언제부턴가 월가 거물들조차 그녀 앞에만 서면 불안한 눈빛을 주고받았다. 그녀는 자신을 금융 먹이사슬의 정점에 선 포식자라 여겼다.
게다가 그녀의 첫 번째 숙주는 초강대국의 대통령, 프롬펠이었다. 투자가 개시되면 그의 자금은 늘 후순위에 배치되었다. 그 차액은 늘 그녀의 몫이 되었다. 그의 자금은 자동으로 그녀의 계좌로 흘러들었다.
그녀의 재테크는 완벽했다.
그럼에도 그녀에 대한 프롬펠의 믿음과 신뢰는 과할 만큼 흔들림이 없었다. 그는 이미 깜깜한 미로 속에서 덫에 갇힌 생쥐 신세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 사실을 알 수도 없고, 설령 안다고 해도 반발할 수 없었다. 그런 줄은 꿈에도 몰랐던 프롬펠은, 불어나는 숫자에 취해 점점 선을 넘고 있었다.
성공에는 언제나 오만이 뒤따른다. 그것은 곧 파멸의 전조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거금을 손에 쥔 그는 더욱 거칠어지고 있었다.
그때, 미셸이 다가와 조용히 말했다.
“드디어 카운트다운이 시작됐습니다.”
칼로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모니터 속 검은 숫자들을 바라보았다.
D-5.
이제 다섯 밤이 지나면, 누군가는 천문학적인 돈을 거머쥘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는 평생 모은 돈을 잃게 될 것이다.
칼로스는 천천히 손을 들어 다음 명령을 입력했다. 그녀의 손끝이 엔터 키 위에 멈췄다.
잠시의 정적. 그리고 낮은 클릭음.
그 순간, 세계의 어딘가에서 열려있던 창문들이 하나둘 조용히 닫히기 시작했다.
☞[데칼코마니 신들의 화폐 - 제 9화 총성 없는 살육]으로 이어집니다.
바이러시아 buyrussia21@buyrussia21.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