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 Sep 2026

연재 소설)데칼코마니 신들의 화폐 - 제 11화 또 다른 나

한반도 위기를 촉매재로 삼아 한-미 양국의 최고위층에서 벌어지는 카지노 자본주의, 국가 권력이 금융시장의 핵무기 격인 파생상품으로 '잭팟'을 노리는 거대한 음모를 담은 본격 추리 소설 '데칼코마니-신들의 화폐'를 작가의 양해를 얻어 연재한다.  

☜이 소설은 한반도 위기를 모티브로 한 가상의 추리 소설이며, 등장 인명·지명·기관·사건 등은 사실과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데칼코마니 신들의 화폐 -제 10화 자작나무의 비밀]에서 계속 

 

[데칼코마니 신들의 화폐 -
 제 11화 또 다른 나] 

동혁은 어린 시절, 늘 지리산 산골을 바라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던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며 자랐다. 아버지의 등은 잔뜩 휘어 있었다. 그 등에는 힘든 삶이 얹혀 있었다. 그것은 가난만이 아니었다. 시대가 찍어 놓은 낙인까지 얹혀 있었다. 

아버지는 때때로 두 주먹을 불끈 쥔 채, 갑자기 이유도 없이 소리를 내지르곤 했다. 
“넌 공부를 잘해도 아무 소용없다. 우리 집안은 빨치산 가족이란 낙인 때문에 아무 것도 할 수 없어. 공부는 포기하고 평생 농사나 지어라.” 

아버지가 영특한 아들에게 늘 하던 당부였다. 당시엔 연좌제의 그림자가 깊게 드리운 시절이었다. 

동혁은 태어나는 순간, 이미 역사의 죄인이 되어 있었고, 평생을 세상에서 밀려나야만 했다. 

소년은 그때마다 이해할 수 없었다. 
왜 공부를 하는 것이 죄가 되는지. 왜 노력하는 일이 아버지의 분노를 불러오는지. 왜 자신에게는, 세상의 문이 이미 닫혀 있어야 하는지. 

그 답을 알기도 전에, 소년의 마음은 깊은 상처로 얼룩져 갔다. 

어느 날, 아버지는 술에 잔뜩 취해 있었다. 그날 아버지는 공부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소년에게 매를 들었다. 

소년은 반항하며 울부짖다 끝내 집을 뛰쳐나왔다. 다행히 거리에서 방황하던 그를 담임 선생님이 거두어 주었다. 그곳에서 그는 겨우 숨을 쉴 수 있었다. 

하지만 그 가족의 불행은 멈추지 않았다. 
동혁에게 여동생이 있었다. 이름은 선애였다.  
아버지는 선애의 중학교 입학을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선애는 강물에 몸을 던졌다. 

어린 여동생의 죽음은 소년의 가슴을 찢어 놓았다. 그날 이후, 아버지의 술주정은 거의 광기가 되었다. 

그러던 어느 새벽, 어머니가 급히 찾아왔다. 어제 초저녁 술에 취해 나간 아버지가 밤새 들어오지 않았다고 했다. 소년은 선생님과 어머니를 따라 지리산 골짜기로 달려갔다. 

아버지는 술에 취하면 할아버지의 유해를 찾겠다며 산을 헤매곤 했다. 소년은 아버지가 수시로 땅을 파던 장소를 잘 알고 있었다. 

새벽안개가 자욱한 골짜기였다. 
뽀얀 안개가 하얗게 피어올라 한 치 앞도 분간하기 어려웠다. 소년은 울창한 나뭇가지를 양팔로 헤쳐 나갔다. 아카시아 가시에 온몸이 찔렸지만, 멈출 수 없었다. 

마침내 손전등에 무언가가 비쳤다. 
아버지였다. 

머리가 깨져 흘러나온 피와 뇌수가 얼굴을 뒤덮고 있었다. 바닥에는 검붉은 피가 흘러넘쳐 있었다. 술에 취한 채 캄캄한 산을 헤매다 높은 낭떠러지에서 추락한 것이다. 

그 참혹한 장면은 어린 소년의 가슴에 깊이 새겨졌다. 
그리고 그의 운명을 짓누르는 또 하나의 무거운 굴레가 되었다. 

장례가 끝나자, 넋이 나간 어머니는 결국 아들을 떠밀듯 집 밖으로 내보냈다. 소년은 힘들 때마다 어머니의 집 사립문 옆에 숨어 그녀를 훔쳐보고 돌아오곤 했다. 때로는 홀로 산에 올라가 마음껏 울고 내려오곤 했다. 

언제나 그의 슬픔은 아무도 모르게 끝나야 했다. 

그는 무너지지 않았다. 총명한 그는 성적으로 자신을 증명했다. 마침내 국내 최고 대학, 서울대학교 경제학과에 수석으로 합격했다. 

어머니는 뛸 듯이 기뻐했다. 
마을 사람들도 지리산의 경사라며 잔치를 열어 주었다. 

그러나 그의 가슴 안에서는 여전히 채워지지 않는 무언가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거친 운명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서울의 어느 봄. 
분노한 시위대에 의해 경찰서가 불타고 있었다.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시위대를 적색분자로 몰아 강경 진압을 선언했다. 

함성과 비명, 최루탄 연기가 세상을 뒤덮었다. 
도시는 아우성을 쳤고, 거리는 전장이 되었다. 

곤봉을 든 진압 대원들이 사람들을 몰아붙였고, 사람들은 흩어지며 도망쳤다. 

그중 한 남학생과 여학생이 막다른 골목에 몰렸다. 
군화 소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때 열린 대문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두 사람은 급히 안으로 뛰어들어 문을 잠그고 장독대 뒤에 몸을 숨겼다. 그들은 숨소리마저 들킬까 봐 가슴을 졸이며 숨을 죽였다. 

잠시 후 군화 소리가 골목을 울렸다. 지나갔나 싶더니, 다시 돌아왔다. 

쾅쾅.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여학생은 남학생의 등에 몸을 바짝 붙이고 떨고 있었다. 남학생은 담장을 넘어 도망치려 했다. 그러자 겁에 질린 여학생이 그의 팔을 꽉 붙잡았다. 

그는 차마 그녀를 두고 갈 수 없었다. 그는 그녀의 손을 잡고 담장으로 달려갔다. 

담장은 너무 높았다. 담장 위에는 깨진 유리 조각들이 날 선 칼날처럼 박혀 있었고, 그 위로 녹슨 철조망이 감겨 있었다. 

사진출처:픽사베이.com
사진출처:픽사베이.com

 

 

남학생은 외투를 벗어 철조망 위에 걸쳤다. 그리고 무릎을 꿇었다. 
“내 등을 밟고 올라가요!” 

그러나 여학생은 고개를 저었다. 오히려 자신이 등을 내주며 말했다. 
“이러다 둘 다 잡혀요. 먼저 가세요.” 

그 순간 경찰이 대문을 걷어차며 고함을 질렀다. 
“문 열어! 폭도들이 들어갔다!” 

겁에 질린 여학생은 울먹였다. 
남학생은 혼자 떠날 수 없었다. 

바로 그때 현관문이 열렸다. 집주인 할머니와 눈이 마주쳤다. 

두 학생은 거의 동시에 말했다. 
“숨겨 주세요!” 
간절한 눈빛이었다. 

대문 밖에서는 고함이 이어졌다. 
“문 열어! 폭도들이 들어왔다!” 

곧 문을 부수고 들어올 것 같았다. 
할머니는 잠시 두 사람을 바라보더니, 손짓으로 어서 안으로 들어가라 했다. 그리고 대문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누군데 남의 집 대문을 부수고 이 난리를 치노! 도대체 뭐꼬!?” 
할머니의 목소리가 골목을 울렸다. 

“빨리 문 여세요. 폭도들이 들어갔습니다.” 
“폭도는 무슨 폭도! 아, 저기 소리 나던데, 저쪽으로 갔을 기다!” 

할머니가 철조망이 둘러쳐진 담벼락을 가리켰다. 진압 대원들이 황급히 담장 위로 올라탔다. 깨진 유리 조각과 철조망을 피해 몸을 비틀며 하나둘 담을 넘어갔다. 

잠시 후, 골목은 다시 조용해졌다. 
대문을 걸어 잠그고 거실로 돌아온 할머니에게 학생들이 떨리는 목소리로 감사 인사를 건넸다. 

“쉿. 조용. 가만히 있그레이. 떠들면 큰일 난데이.” 
할머니는 곧장 부엌으로 향했다. 그리고 사발에 물을 가득 떠 와, 숨을 몰아쉬는 학생들에게 하나씩 건넸다. 

“우선 물부터 마시고 진정해라.”
두 사람은 허겁지겁 물을 마셨다. 

그제야 비로소 서로를 바라보았다. 
여학생의 깊고 맑은 눈망울은 숨이 멎을 만큼 아름다웠다. 남학생의 얼굴에는 수염과 장발, 피로가 엉켜 있었지만, 그 역시 단번에 눈길을 끌 만큼 수려한 외모였다. 

첫눈에 운명적인 사랑을 느낀 것일까. 
그 순간,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한 시선을 거둘 수 없었다. 

“너거들, 밥은 묵었나?” 
할머니의 목소리에 두 사람은 비밀을 들킨 것처럼 당황했다. 여학생의 얼굴에는 홍조까지 번졌다. 남학생이 서둘러 말했다. 

“괜찮습니다. 폐를 끼치는 것 같아…” 
“가만있거래이.” 

할머니는 그의 말을 끊고 부엌으로 향했다. 찬거리를 준비하는 동안, 남학생은 머뭇거리다가 여학생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저… 혹시 어느 학교 다니세요?” 
여학생은 마치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대답했다. 
“전 서울대학교 신문방송학과 안혜경입니다.” 

그녀는 눈을 반짝이며 되물었다. 
“그럼 그쪽은요?” 
“저도 바로 그 학교, 경제학과 전동혁입니다.” 

혜경의 눈이 커졌다. 
“아! 지금 수배 중인 그 전동혁? 학생회장?” 

동혁은 쑥스러운 듯 고개를 숙였다. 
“네. 그 전동혁 맞습니다.” 
“수배 중인데 또 시위에 나서시다니… 대단하세요. 지난번 연설, 먼발치에서 본 적이 있어요. 오늘은 수염 때문에 다른 사람 같았어요.” 
“감사합니다.” 

동혁은 상기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곧 눈길을 피했다. 

혜경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이렇게 만날 줄은 몰랐어요. 아직도 가슴이 뛰어요.” 

전동혁은 2학년임에도 학생회장을 할 정도로 학생들의 우상이었다. 큰 키에 잘생긴 얼굴, 그러나 이미지는 순한 양처럼 부드러웠다. 누구에게나 호감을 주는 얼굴이었다. 

그의 연설이 예고되면 각 학교의 여학생들을 교실에서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 혜경도 호기심에 친구들을 따라 먼발치에서 그의 연설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날, 깃발이 흔들렸고 구호와 함성이 겹쳐 하나의 소음이 되었다. 

그 소란 속에서 혜경은 이상하게 조용해졌다. 

연단 위에 선 한 남학생. 
그의 말은 세상을 향하고 있었지만, 그녀는 자신을 향했다고 느꼈다. 그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깊었고, 짧았지만 전부였다. 

그 짧은 찰나에 혜경은 알 수 없는 확신을 가졌다. 
이 사람을, 잊지 못하겠다고. 

그 후 그녀는 각종 시위에 열성적으로 참여했다. 결국 오늘의 인연도 그로 인한 것이었다. 

그의 호소력 넘치는 연설이 그녀의 감성을 자극한 것일까. 아니면 곧 다가올 운명적 사랑을 직감한 것일까. 

그를 만난 혜경의 가슴은 진정되지 않고 콩닥콩닥 뛰었다. 
‘매력이 넘친다.’ 

그녀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멋진 사람이다.’ 

사실 그녀는 오래전부터 이미 그를 흠모하고 있었다. 

그때 할머니가 밥상을 차려 들어왔다. 
“아이구! 이렇게 잘생기고 예쁜 학생들이 데모를 했구나!” 

할머니는 식사하는 두 사람의 얼굴을 번갈아 살피며 감탄했다. 

혜경은 단순히 예쁜 얼굴이 아니라, 시선을 빼앗는 존재였다. 하얀 티와 청바지 차림의 늘씬한 몸매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갸름한 얼굴 위로 옅은 쌍꺼풀이 드리워져 있었고, 맑은 눈동자는 유리처럼 투명하게 빛났다. 오뚝한 코는 날렵하면서도 부드러운 곡선을 그렸고, 잡티 하나 없는 피부는 조명을 받은 듯 환했다. 

할머니는 혜경의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참 늘씬하고… 예쁜 학생이네.” 

이번엔 동혁을 찬찬히 살펴봤다. 
“학생도 키가 크고 참 잘생겼다. 서로 아는 사이는 아닌 것 같은데?” 

할머니는 번갈아 두 사람을 쳐다보며 대답을 재촉했다. 
동혁이 허겁지겁 밥을 먹다가 대답했다. 
“네, 오늘 처음 본 사이입니다.” 

말을 끝내자마자 그는 다시 수저를 밥그릇에 가져갔다. 며칠은 굶은 모습이었다. 

할머니는 금방 빈 밥그릇을 보고 웃었다. 
“아이고, 배가 고팠구나. 금방 더 해 줄게.” 

그날 밤, 할머니는 집에서 담근 포도주를 내왔다. 세 사람은 작은 식탁에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늘 홀로 지내던 할머니는 말동무도 생기고 취기도 오르자 들뜬 기색이었다. 잔이 오가자 세 사람의 얼굴이 불그레해졌다. 

할머니는 궁금한 것이 많은 듯 질문을 이어 갔다. 
혜경은 기꺼이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반면 동혁은 몇 번이나 입을 떼다가 말끝을 삼켰다. 

할머니는 답답한지 연신 그를 다그쳤다. 
“야야, 답답하다! 야가 갑자기 와 이래 떠듬떠듬하노?” 

할머니의 거듭된 재촉 끝에, 동혁은 그만 애써 눌러 왔던 기억의 파편들을 봇물 터지듯 쏟아 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 그리고 어린 여동생의 죽음. 소년 시절의 참담한 절망. 자신 때문에 더 깊어져 갔던 어머니의 한탄까지. 끝내 그는 입술을 깨물며 어깨를 들썩였다. 

할머니는 소맷자락으로 눈가를 훔치며 그의 등을 토닥였다. 
“에이구, 이런…. 괜히 물었네. 미안하구나. 보기보다 너무 가여운 친구네.” 

혜경 역시 흐느꼈다. 그 날, 동혁의 깊은 한숨과 뜨거운 오열은, 그대로 그녀의 슬픔과 아픔이 되어 영혼 깊이 스며들었다. 할머니는 미안한 마음에 농담을 던졌다. 

“너거, 나중에 결혼하면 참 예쁜 아이들 낳겠데이.” 

할머니의 얼굴에는 장난기가 가득했다.  

동혁이 당황하며 손을 내저었다. 
“아니에요, 할머니. 저흰 오늘 처음 만났어요.” 
“너거, 내 눈은 못 속인다. 벌써 양쪽에서 불꽃이 튀던데? 킁킁, 냄새도 나는데?” 

할머니의 과장된 말에 혜경의 얼굴도 붉어졌다.

할머니는 손을 내두르며 큰소리로 말했다. 
“너거, 내가 박사인 건 모르나? 박사야, 박사!” 

두 사람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정말이세요, 할머니? 어느 대학, 무슨 전공이에요?” 

할머니는 장난스럽게 눈을 찡긋했다. 
“난 동대문 대학교 출신이지. 자, 맞춰 봐라. 무슨 박사일까요?” 
“네? 동국대가 아니라 동대문이요?” 
“그래, 동대문 대학교야. 그것도 학위가 두 개지. 인생 박사, 눈치 박사다.” 

할머니가 소리 내어 웃자, 두 사람도 따라 웃었다. 

그날 처음으로 마음 편히 웃는 순간이었다. 
“내가 동대문시장에서 무려 50년을 버텼다. 인생 공부를 넘치게 많이 했지. 눈치는 나 당할 사람 없었다. 그러니 박사 아이가.” 

할머니가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박사가 보니, 벌써 서로 폭 빠졌네, 빠졌어. 호호.” 

혜경이 얼굴을 가리며 웃었다. 
“할머니도 참!” 
“괜찮다, 뭐가 그리 부끄럽노?” 

할머니는 더 신이 났다. 
“너거, 그거 아나? 너거들 나이는 첫눈에, 그것도 단 몇 초 만에 사랑에 폭 빠진다. 동혁이 이 친구 얼굴 한번 봐라. 벌써 얼굴이 빨개졌네. 호호호.” 

동혁도 얼굴이 붉어졌다. 
“아이참, 할머니도….” 

할머니는 다시 입을 열었다. 
“남녀가 만나 불꽃 튀는 사랑에 빠지는 건 말이다. 10대는 단 1초, 20대는 20초, 30대는 3시간이야. 너거는 아직 그것도 모르는구나. 호호호.” 

두 사람은 또 웃음꽃을 피웠다. 

혜경이 장난스럽게 물었다. 
“그럼 할머니 나이엔 얼마나 걸리나요?” 
“나? 우리 나이엔 그런 사랑은 없어. 그저 손에 뭘 들고 있나 눈치로 재보고, 곁눈질로 돈 두께도 살짝 훔쳐보면서, 사랑보다는 정만… 그것도 아주 쬐금만 주는 기라. 그치, 혜경아? 호호호.” 

그들은 활짝 웃었다. 동혁의 얼굴에도 밝은 기운이 돌아왔다. 혜경은 그가 다시 웃는 모습을 보고 마음이 편해졌다. 할머니가 다시 말했다. 

“사랑은 갑자기 운명처럼 다가오는 게 진짜 사랑이다. 첫눈에 자석처럼 바로 착 달라붙는 것. 바로 그런 기라. 그걸 원초적 사랑, 또 불변의 사랑이라 안 카나.” 

할머니는 잔을 내려놓고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봤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다들 그런 사랑을 원한다고 하면서도, 돌아서면 계산기를 두드린다. 그런 건 사랑이 아이다.” 

두 사람은 할머니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서로의 눈을 피하다가도, 어느새 다시 마주쳤다. 

그들의 첫사랑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눈길이 닿는 매 순간마다 세상은 숨을 삼킨 듯 먹먹해졌고, 시간은 잠시 멈춰 섰다. 말문은 막히고 숨은 얕아졌다.  

그것은 가슴 깊은 곳에서 불현듯 피어오른 불꽃이었다. 조용히 타오르면서도 순식간에 온몸을 물들이는 열기였다. 세상은 아득히 멀어지고, 오직 한 사람만 또렷해지는 순간. 그 떨림은 이미 되돌릴 수 없는 시작이었다. 끝내 지워지지 않는 영원한 각인이었다.

그날 밤, 혜경은 아카시아 꽃향기처럼 달콤했고, 장미처럼 눈부셨으며, 백합처럼 맑았다. 

동혁에게 그녀는 어둠 속에 문득 스며든 한 줄기 빛과도 같은 존재였다. 

세 사람은 포도주를 나누며 밤을 보냈다. 취기가 오른 할머니도 자신의 삶을 한탄하듯 입을 열었다. 
“동혁아… 나도 너처럼 한이 많은 사람이다. 세상에 대한 원망이 너무 많아서, 그걸 품고 사는 게 너무 힘이 들더라.” 

할머니의 목소리가 촉촉하게 젖어 들었다. 
“그 한이 결국 독이 돼서 내 몸도 마음도, 삶도… 모두 그 독에 다 녹아내렸지. 내 얘기도 한 번 들어나 볼래?” 

할머니의 이름은 황금순이었다. 고향은 경남 밀양. 열일곱에 시집갔지만, 남편은 결핵에 걸려 약 한 번 제대로 써 보지 못한 채 갓 돌 지난 아들을 두고 세상을 떠났다. 

그 뒤 그녀는 어린 아들을 업고 서울에 올라와 동대문시장에서 행상을 하며 생계를 이었다. 그러나 아들이 다섯 살 때 백혈병을 앓았다. 돈이 없다는 이유로 병원에서 문전박대를 당했고, 결국 치료 한 번 제대로 받아 보지 못한 채 아들마저 세상을 떠났다. 

할머니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다 돈 때문이었어. 에휴. 세상의 돈이란 게 말이다, 결국 누군가의 피눈물에서 시작되는 거다. 나 역시 그 피눈물이 바로 종잣돈이었어.” 

그녀는 쓸쓸하게 웃었다. 
“난 미친 듯이 돈을 모았지. 그런데 이제 그게 다 무슨 소용이 있겠노?” 

할머니의 한숨이 방 안을 무겁게 눌렀다. 눈시울이 붉어진 혜경은 할머니에게 다가가 주름진 손을 꼭 잡았다. 
“할머니, 그동안 많이 힘드셨지요. 힘내세요.” 

할머니는 억지로 웃었다. 
“이젠 괜찮다. 교회도 나가고, 힘든 사람들도 조금 돕고… 그래서 내가 산다는 거 아이가.” 

눈물을 글썽이던 동혁도 말없이 다가와 할머니를 감싸 안았다. 
“할머니 말씀을 들으니 갑자기 친할머니 생각이 나요. 기억은 없지만요….” 

할머니의 주름진 손이 동혁의 등을 가만히 토닥였다. 
“동혁아,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불은 마음에서 타오르는 불이다.” 

할머니가 동혁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 불은 세상을 밝히기도 전에, 먼저 너 자신을 송두리째 태우는 기라. 하루라도 빨리 꺼야 한다.” 

잠시 세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윽고 할머니가 먼저 몸을 일으켰다. 
“그나저나 이제 자야지. 내가 이불 챙겨 줄게.” 

밤은 깊어만 갔다. 잠들었던 동혁은 살며시 눈을 뜨고 몸을 일으켰다. 할머니 건너편에 고요히 잠든 혜경의 뽀얀 얼굴을 한참 바라보았다. 

그리고 벽시계를 올려다보았다. 
똑딱. 똑딱. 

이별을 재촉하는 시계의 초침이 유난히도 야속했다. 이 밤이 지나면 다시 만날 기약이 없다는 사실이 가슴을 저미게 했다. 

깜빡 잠든 혜경도 바람에 흔들린 창문 소리에 놀라 눈을 떴다. 이내 건너편의 동혁을 쳐다보았다. 곤히 자는 그의 얼굴을 보고 안도한 뒤 다시 눈을 감았다. 그녀는 마치 큐피드의 화살에 맞아 영혼을 빼앗긴 프시케처럼 보였다. 

그들이 처음 서로를 본 순간, 곧 다가올 쓰라린 이별의 고통을 이미 예감한 것이었을까. 심장은 이유도 모른 채 걷잡을 수 없이 뛰었고, 단 하루 만에 가슴 깊이 각인된 사랑은 예정된 이별 앞에서 더욱 가슴을 저미게 했다.

다음 날 오후. 
두 사람이 떠날 준비를 하고 있을 때, 할머니가 신문지에 둘둘 만 두툼한 현금을 내밀었다. 

“이거면 졸업할 때까지 학비와 생활비는 될 거다. 이 할미가 주는 거니 요긴하게 써라. 그리고 힘내라.” 

할머니는 미소 지으며 주름진 손으로 동혁의 어깨를 다독였다. 
동혁은 손사래를 쳤다. 
“아닙니다, 할머니. 신세도 많이 졌는데 전 받을 수가 없어요.” 

할머니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이건 거저 주는 게 아니다. 니가 또 다른 이 할미가 돼서 천 배, 만 배로 불려서 불쌍한 사람 도와주면 된다.” 
“죄송하지만 전 이 돈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동혁은 끝내 완강했다. 할머니는 난감한 듯 잠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두 사람의 손을 이끌어 소파에 앉혔다. 

인자했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눈빛은 단호해졌다. 
“내가 동대문시장에서 평생을 살았다. 온갖 인간들을 다 만나며 웃기도 했지만, 욕도 먹어 가며 싸우고, 울기도 참 많이 했다.” 

할머니의 목소리는 오랜 세월이 녹아든, 골목의 냄새처럼 깊었다. 그녀의 손엔 오래된 굳은살이 박여 있었고, 그 굽은 손끝마다 세월의 고단함이 온전히 새겨져 있었다. 

“어제 내가 인생 박사라 그랬재. 오늘은 내가 학교나 교회에선 절대 안 가르쳐 주는 걸 조금만 알려 줄게.” 

두 사람은 자연스레 고개를 숙였다. 
“네, 할머니. 말씀하세요.” 

동혁과 혜경은 할머니의 양손을 잡았다. 마치 그 손끝에서 흘러나오는 삶의 지혜를 놓칠세라, 조심스레 감싸는 듯했다. 

“첫 번째는 냄새 이야기다.” 

미소 띤 할머니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사람은 가까이 가면 갈수록 악취가 나는 사람이 있고, 단내가 나는 사람이 있다. 냄새는 절대 거짓말을 못 한다.” 

그녀는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러니 사람도 가끔은 개코가 되어야 한다. 말은 꾸며도, 사람 됨됨이는 못 꾸미는 기라.” 

혜경이 웃으며 장난스럽게 물었다. 
“그럼 할머니는 우리 냄새를 맡아 보셨어요? 호호호.” 
“그럼, 벌써 맡았지! 내가 늘 킁킁 안 하더나? 호호호.” 

할머니는 동혁에게 다가가며 진짜로 킁킁 냄새 맡는 시늉을 했다. 동혁도 크게 웃었다. 

그 웃음이 잦아들 무렵, 할머니는 동혁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너거들 냄새는 내가 다 맡아 봤고… 그리고 또 하나. 이번엔 더 중요한 거다.” 

할머니의 음성은 깊어졌다. 오랜 세월의 무게감이 느껴졌다. 
“사람은 누구나 첫 번째 선심엔 고마워한다. 두 번째 선심엔 이유를 찾고, 세 번째부터는 그걸 권리로 여긴다.” 

두 사람은 말없이 할머니를 바라보았다. 
“사람이 분노하는 건, 당연하다고 믿던 것이 당연하지 않을 때부터다.” 

혜경과 동혁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할머니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가볍지 않았다. 

“결국 그 선심이 끊기면, 바로 적이 되는 거야.” 

할머니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이어 갔다. 
“학교나 교회에서는 자비와 용서를 계속하라 하지만, 그게 다 옳은 말은 아이다. 끝없이 베풀다 보면, 그건 내 손으로 악의 씨를 뿌리는 꼴이 되거든.” 

동혁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반문했다. 
“악의 씨라고요?” 
“그래.” 

할머니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한쪽이 늘 양보하고 배려만 하다 보면 결국은 무너지게 마련이야. 가까운 사람이 적으로 돌아서면 그 상처는 백배는 더 아프지.” 

할머니의 시선이 잠시 허공을 더듬었다. 
“사랑도 다르지 않아.” 

혜경의 눈빛이 흔들렸다. 할머니는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사랑은 아낌없이 주는 것이라 했지만, 연인 사이도, 부모와 자식 사이도… 일방적인 사랑이 때로는 깊고도 쓰린 상처로 되돌아올 때가 많다. 그건 사랑이 부족했다기보다, 넘쳤기 때문인 경우가 더 많아.” 

혜경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어디까지 베풀어야 할까요?” 

할머니는 눈을 감았다. 잠시 시간이 멈춘 듯했다. 
“그건 고마움이 권리로 넘어가기 직전.” 

할머니가 천천히 눈을 떴다. 
“시장 막대저울로 말하면, 그 막대가 딱 멈추는 지점일 거다. 그 균형이 깨지면, 선도 악을 낳는 기라.” 

할머니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돈다발보다 더 무거운 말이 떨어졌다. 
“그러니까 딱, 멈출 줄 알아야 한다.” 

그들에겐 할머니의 말과 미소에서 낯선 깨달음이 다가왔다. 

세상에선 선과 악이 쉽게 분간되지 않았다. 인생이란 거울 속에서, 선은 자칫 또 다른 악의 전조가 될 수 있었다. 

할머니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이런 이치를 잘 아는데, 또 주겠나? 내가 너하고 등을 지고 싶겠냐 말이다.” 

할머니는 다시 돈다발을 내밀었다. 
“이 돈은 처음이자 마지막 돈이란 말이다. 네가 또 다른 이 할미가 되라 캤제?” 

동혁은 또다시 뒤로 물러났다. 할머니는 난감한 듯 입술을 깨물었다. 
“내가 관상은 좀 본다. 이건 그냥 주는 돈이 아니다.” 

할머니의 목소리가 단단해졌다. 
“앞으로 네가 그릴, 오늘보다 조금 나은 내일을 내가 미리 사 두는 기다. 투자다, 이 말이다.” 

할머니는 또다시 돈을 내밀었다. 그러나 또 동혁은 고개를 저었다. 

할머니는 난감한 듯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리고 잠시 돈을 움켜 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던 할머니가, 문득 엉뚱한 말을 꺼냈다. 

“아휴… 내말 잘 들어봐라. 너거들은 똑똑하니까. 아인슈타인 박사의 상대성 이론 알 거다. 내는 장사밖에 모르는 늙은이지만, 오래 살다 보이께 그게 우주의 법칙만 말하는 거는 아이더라. 사람 사는 이치도 결국 거기 다 들어 있는 기다.” 

할머니는 동혁의 손을 붙잡았다. 
“세상에는 영원한 것도 없고, 무한한 것도 없다. 공짜는 없다. 모든 게 다 상대적이다. 내가 이러는 것도 다 이유가 있다는 말이다. 이제 이 할미는 숨이 넘어갈 지경이다. 어서 받아라.” 

할머니가 동혁의 손에 돈을 쥐여 주려 했지만, 그는 다시 물러섰다. 
“할머니, 그 돈은 할머니의 피땀입니다. 전 그 돈을 쓸 자격이 없습니다. 용서해 주세요.” 

그러자 할머니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의 앞을 막아섰다. 입술과 손이 떨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 떨림은 분노가 아니라 단호한 결심이었다. 

“네가 끝까지 이거 안 받으면, 오늘 여기서 못 나간데이.” 
막무가내로 밀어붙이는 할머니 앞에서, 동혁은 더 버티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아휴, 돈 주는 게 이렇게 힘든 일인 줄은 오늘 처음 알았데이. 에고.” 
할머니는 온몸의 힘이 다 빠져나간 듯 털썩 주저앉았다. 아무도 선뜻 입을 열지 못했다. 

그 정적 속에서 세 사람의 가슴에는 애틋한 사랑과 연민이 조용히 번져 나갔다. 

할머니의 손을 잡은 동혁의 눈시울이 붉게 물들었다. 목이 메어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 순간, 말 대신 오래된 기억의 잔상들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부모와 자식. 연인과 부부. 형제와 친구들. 
사랑은 왜 가까운 사람 사이에서 더 어렵고, 더 아픈 것일까. 사랑은 서로를 몰라서 무너지는 것이 아니었다. 가깝다는 이유로 더 많은 것을 기대했고, 가깝다는 이유로 무시했다. 

사랑한다는 이유 하나로 더 쉽게 상처를 주고받았다. 서로가 지치고, 아파하며, 흔들리는 상대의 상처와 한계를 잊어버릴 때, 사랑은 조용히 금이 가기 시작했다. 

어쩌면 사랑은 가까운 누군가에게 완벽함을 요구하는 일이 아니라, 그들도 나처럼 나약한 인간이라는 사실까지 품어 주어야 하는 일인지도 몰랐다. 

결국 사람을 보듬어 준다는 것은, 먼저 그 마음을 논리로 헤아리고, 그 논리를 다시 마음으로 데우며, 끝내 그 온기를 조심스럽게 건네는 일이었다. 
그래서 사랑이란 참으로 어려운 감정이었다. 

그날 저녁, 그들은 가족 외출로 위장해 할머니 집을 나섰다. 동혁은 할머니를 꼭 안아 드렸다. 그리고 혜경에게 다가왔다. 혜경은 그의 손을 꼭 잡았다. 

“동혁아, 몸조심해. 그리고… 꼭 다시 만나.” 

그녀는 애타는 눈빛으로 대답을 기다렸다. 

단 하루의 인연. 그것이 운명적 사랑인지, 고독한 영혼에 대한 연민인지, 그녀는 스스로 구별할 수 없었다. 

동혁은 끝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눈가에 고인 눈물이 그의 심정을 대신했다. 곧 체포되어 암울한 미래로 끌려갈 자신은, 다시는 그녀를 만날 수 없으리라는 절망에 말문이 닫힌 것이다. 

그는 뒤돌아보지 않고 성큼성큼 멀어졌다. 할머니와 혜경은 애처로운 눈으로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날 이후, 혜경의 평온하던 일상은 동혁의 운명, 그 거친 삶의 궤도로 순식간에 빨려 들어갔다. 

한편, 동혁이 탄 버스의 창밖으로 세상이 천천히 흘러갔다. 부드러운 노을빛이 창문에 닿을 때마다, 혜경의 맑고 깊은 눈망울이 떠올랐다. 
동시에, 강물에 몸을 던졌던 여동생 선애의 눈동자가 겹쳤다. 

그 순간 뜨거운 눈물이 차올라 시야가 흐려졌다. 동혁은 소매로 눈가를 훔치며 조용히 숨을 삼켰다. 마음이 조금 가라앉을 즈음, 어디선가 봄날의 바람결 같은 혜경의 웃음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오는 듯했다. 

그는 창문에 이마를 기댄 채 눈을 감았다. 세상이 어둑해지고, 도시의 불빛이 하나둘 켜지기 시작할 때, 그의 가슴에서도 혜경의 온기가 불을 켜고 소리 없이 퍼져 나가고 있었다. 

혜경은 그후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자주 할머니 집을 찾았다. 할머니와 함께 교회에 가서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차마 동혁의 안부를 묻지도 못한 채 돌아서곤 했다. 

어릴 적 부모를 따라 미국에 이민 갔던 혜경은 유학을 마치고 홀로 한국에 돌아와 대학에 다니고 있었다. 
그녀는 어디를 가나 늘 미모와 미소로 눈에 띄었다. 게다가 공부와 음악, 운동과 무술까지 모든 면에서 빛나는 팔방미인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단 한 번의 이성 교제도 하지 않았다. 그런 그녀가 동혁을 만나자, 마치 운명처럼 가슴 깊이 강렬한 첫사랑이 새겨졌다. 

어느 날, 할머니가 결국 말을 꺼냈다. 
“니… 너무 보고 싶구나?” 

매번 힘없이 되돌아서는 혜경의 슬픈 얼굴을 알면서도 애써 모르는 척하던 할머니였다. 그 한마디에 혜경은 그만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온몸을 들썩이며 흐느끼기 시작했다. 

혜경이 한동안 울음을 멈추지 못하자, 할머니는 쩔쩔매며 당황했다. 
“에그, 요놈의 주둥이가 문제구나. 네가 하도 가여워서 나도 모르게 그랬다. 미안하구나, 아이고, 내 새끼….” 

할머니는 혜경을 따뜻하게 안아 주며 달랬다. 
“걱정하지 마라. 그놈은 쉽게 잡힐 놈이 아니다. 어디선가 잘 버티고 있을 기다.” 

할머니는 일부러 목소리를 높였다. 
“이 나쁜 놈! 혹시라도 연락 오면 내가 제일 먼저 알려 주마.” 

할머니는 떨리는 손으로 혜경의 작은 얼굴을 감싸 안았다. 옷깃으로 조심스레 그녀의 눈물을 닦아 주며 등을 다독였다. 

잠시 후, 혜경은 축 늘어진 어깨로 천천히 돌아섰다. 할머니는 그녀의 뒷모습이 한 점의 그림자도 남김없이 사라질 때까지,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애처로운 눈빛으로 한없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혜경의 발걸음이 멀어질수록, 할머니의 가슴 한쪽이 서서히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이유 없는 불안은 언제나 정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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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러시아 buyrussia21@buyrussia21.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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