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 Sep 2026

연재 소설)데칼코마니 신들의 화폐 - 제 10화 자작나무의 비밀

한반도 위기를 촉매재로 삼아 한-미 양국의 최고위층에서 벌어지는 카지노 자본주의, 국가 권력이 금융시장의 핵무기 격인 파생상품으로 '잭팟'을 노리는 거대한 음모를 담은 본격 추리 소설 '데칼코마니-신들의 화폐'를 작가의 양해를 얻어 연재한다.  

☜이 소설은 한반도 위기를 모티브로 한 가상의 추리 소설이며, 등장 인명·지명·기관·사건 등은 사실과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데칼코마니 신들의 화폐 -제 9화 총성 없는 살육]에서 계속 

 

[데칼코마니 신들의 화폐 -
 제 10화 자작나무의 비밀]

어느 금요일 밤, 칼로스가 백악관을 찾았을 때, 대통령 프롬펠 옆에는 낯선 인물이 있었다. 흐트러짐 없는 정장. 온화한 미소. 그러나 눈빛만큼은 차가웠다. 

CIA 국장, 한트 케리였다. 

그녀가 놀란 표정을 짓자, 프롬펠은 기다렸다는 듯 서둘러 말을 던졌다. 
“칼로스, 내 친동생 같은 사람이야. 이 친구도 좀 도와주게.” 

칼로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은 짧았지만, 이미 참을 수 없는 불쾌감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프롬펠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 이 친구도 이미 다 알고 있어.” 
그는 너무도 태연하게 말했다. 그녀는 억눌린 감정을 담아 입을 열었다. 

“그럼 투자나 정산이 복잡해집니다.” 
프롬펠은 곧바로 손을 내저었다. 그리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건 걱정하지 마. 나와 공동 투자로 처리하고, 나중에 정산하면 돼.”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한트 케리가 슬며시 끼어들었다. 

 “천만 달러를 투자하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목소리는 정중했다. 그러나 압박이었다. 
"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녀의 말은 공손했지만, 그녀의 속내는 매우 불쾌했다. 
‘미스터 프롬펠. 이젠 날 감시하고 통제하려는 거군. 이건 반칙이야.’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말을 내뱉었다. 
“세계가 아우성칩니다. 약자들이 힘들어하니, 조금 고삐를 늦추시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말을 끝내자마자 그녀는 후회했다. 

순간 프롬펠의 눈빛이 서늘하게 변했다. 
“칼로스.” 

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날카로웠다. 
“약육강식, 적자생존, 승자독식은 동물의 세계에서만 있는 이야기가 아니야. 그건 인류의 역사이자 신의 섭리야.” 

그는 그녀에게 몸을 기울이며 덧붙였다. 
“우린 그저 우주의 법칙에 충실하면 되는 거야. 괜히 그따위 쓸데없는 소리로 판을 흐리지 마.” 

칼로스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이 늙은 영감탱이.’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 
‘CIA 국장까지 붙여 놓고 이제 말도 함부로 하네.’ 

그러나 프롬펠은 아직 멈추지 않았다. 
“신의 창조, 이 우주의 질서에 사랑과 연민, 존중과 배려 따위가 어디에 있소? 말해 봐, 칼로스. 말해 보라고.” 

그는 그녀가 말할 틈조차 주지 않았다. 
“연민, 자비, 그런 말은 거지들의 언어야. 없는 것들이 늘 입에 달고, 구걸할 때 쓰는 단어라고. 자네가 거지야? 아니면 그들의 보호자라도 되는 건가? 정신 차려!” 

자신의 어설픈 궤변에 스스로 함몰된 그는 또 선을 넘고 있었다. 

칼로스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것은 차디찬 경멸이었다. 
‘내가 거지라고?’ 

그녀의 속에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런 당신은 끔찍한 괴물이야.’ 
하지만 그녀는 재빨리 표정을 바꾸었다. 

이곳은 백악관이었다. 그리고 방 안에는 CIA 국장이 앉아 있었다. 
칼로스는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오늘은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녀는 공손하게 인사한 뒤,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프롬펠의 얼굴에 묘한 불안감이 스쳤다. 

그는 곧바로 전화를 들었다. 
“칼로스, 미안하네. 하지만 든든한 해결사가 생겼다고 생각하게. 큰 힘이 될 거야. 하하하.” 

수화기 너머에서 칼로스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해결사.’ 

그녀는 속으로 냉소했다. 
‘그건 올가미잖아. 게다가 조롱까지.’ 

그러나 그녀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네, 고맙습니다.” 

전화를 끊은 뒤, 그녀의 온몸에 소름이 돋아 올랐다. 

그날 이후, 한트 케리는 특별한 이유도 없이 자주 칼로스를 찾아왔다. 언제나 흐트러짐 없는 단정한 차림, 이웃집 아저씨 같은 따뜻한 미소, 지나칠 정도로 아낌없는 찬사까지. 모든 언행이 지나치게 다정했다. 

너무 매끄러워서 오히려 불길했다. 
하지만 그녀는 첫눈에 알아봤다. 
‘세상에는 결코 거친 언행과 험상궂은 얼굴을 한, 나쁜 인간들만 있는 게 아니야. 오히려 이 자처럼 간이라도 빼 줄 듯 부드러운 미소와 달콤한 말로 다가오는 자들이 더 위험하지.’ 

그들이 놀리던 부드러운 혀는 어느 순간 갑자기 번뜩이는 비수로 돌변한다. 

그래서 칼로스는 그에 대한 경계심을 단 한 번도 늦추지 않았다. 
‘이 세상의 생명체 중 가장 위험하고 무서운 동물은 사람이다.’ 

그녀는 오래전부터 그렇게 믿었다. 
‘사람이 사람을 감별하지 못하면, 반드시 큰 낭패를 본다.’ 

역시 그녀의 직감은 틀리지 않았다. 

한트 케리의 미소는 칼날을 감추는 가면에 불과했다. 그의 웃음 뒤에는 언제나 서늘한 그림자가 일렁였다. 날카로운 눈빛은 늘 계산기를 두드리듯 상대를 살폈다. 그도 상대의 주머니를 털어 가는 또 하나의 포식자였을 뿐이었다. 

겉으로는 친절한 파트너의 가면을 썼지만, 그의 시선은 언제나 매서웠다. 그녀의 말투, 표정, 손끝 하나까지 놓치지 않는 냉정한 감시자의 눈빛이었다. 

그날도 그는 능청스러운 미소를 띠며 서류 한 장을 그녀 앞으로 밀어 놓았다. 
“사람이 좀 필요하다고 했소? 이 사람들 한 번 검토해 보시오.” 

그 순간, 칼로스는 직감했다. 
그가 심복을 심으려 하고 있었다. 
“네. 검토해 보겠습니다.”
그녀의 대답은 짧고 건조했다. 

케리는 잠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여전히 미소를 띠고 있었다. 

며칠 뒤 늦은 저녁. 
미셸 티모는 사무실 불을 끄고 길을 나섰다. 
거리에는 퇴근길의 잔향만 남아 있었다. 신호등은 규칙적으로 깜박였고, 젖은 아스팔트 위로 가로등 불빛이 길게 번졌다. 

그의 뒤에는 그림자 하나가 사라졌다 나타나곤 했다. 티모는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잠시 후, 좁은 골목에서 그가 휴대전화를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브레이크가 풀린 검은 차량 한 대가 미친 듯이 달려들었다. 

끼이익. 
쿵. 

번쩍하는 불빛과 엄청난 충격음이 캄캄한 어둠을 갈랐다. 

티모의 몸은 허공에 튕겨 나갔다. 
그는 바닥에 떨어져 굴렀고, 휴대전화는 부서졌다. 
검은 차량은 그대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남은 것은 피투성이로 쓰러진 그의 몸뿐이었다. 의식이 없는 그를 실은 구급차가 병원으로 향했다. 

다음 날, 사건은 단순 교통사고로 처리되었다. 하지만 그 소식을 듣는 순간, 칼로스의 가슴은 차갑게 얼어붙었다. 

‘이건 결코 우연일 리 없어.’ 

그녀의 예민한 촉은 이미 진실을 감지하고 있었다. 
‘한트 케리.’ 

그녀의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그 자식 짓이다.’ 
하지만 진실은 종종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 날의 진실은 그대로 침묵해야 했다. 

며칠 뒤, 공석이 된 자리를 메우기 위해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신규 직원 두 명을 급히 채용했다. 
한 명은 남자. 한 명은 여자. 
첫인상은 좋았다. 이력도 완벽했고, 능력 또한 출중했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CIA의 검증을 거쳐 고용된 용역들이었다. 
스파이였다. 

그들은 말없이 업무에 적응하는 척하면서, 서류 파일과 전산 기록, 심지어 거래 메일까지 교묘히 빼내 정기적으로 보고서를 올리고 있었다. 보고 대상은 다름 아닌 한트 케리였다. 

보름쯤 지났을까. 
칼로스가 퇴근길에 사무실 문을 잠그려는 순간, 한트 케리가 불쑥 나타났다. 그는 친근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칼로스는 경멸의 눈초리로 그를 바라보았다. 
‘벼룩도 낯짝이 있지. 어쩜 저렇게 뻔뻔스럽지?’ 

그러나 케리는 그녀의 싸늘한 눈빛을 무시했다. 
그는 서류봉투 하나를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낮고 묵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열어 보시오.” 

그것은 권고가 아니었다. 명령이었다. 짧고 굵은 말 한마디에 방 안의 공기마저 얼어붙었다. 

칼로스의 예민한 촉이 즉각 위험을 통보했다. 입술에 미세한 경련이 번졌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봉투를 열었다. 그 안에는 그녀가 숨겨 둔 모든 비밀이 담겨 있었다. 

어두운 치부가 검은 활자와 숫자로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었다. 
차명 계좌. 선취매 기록. BR사와 SM사로 흘러간 정보. 성과급. 고정급. 프롬펠 자금의 후순위 배치. 
그리고 그녀가 프롬펠 몰래 챙긴 차익까지. 

케리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꼬리가 길면 밟힌다고 하지 않았소?” 

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서늘했다. 
“놀랍군. 미국 대통령이 자네의 첫 번째 숙주라니.” 

그의 눈빛이 칼날처럼 날카로워졌다. 
“대통령의 피를 빨고 있었군.” 

칼로스는 즉시 얼어붙었다. 숨이 막혔다. 
목구멍은 바짝 타올랐고,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케리는 그녀의 반응을 천천히 음미했다. 
그리고 침묵했다. 

그 순간, 칼로스에게는 테이블 위의 서류보다 그의 침묵이 더 무서웠다. 

한참이 흐른 뒤, 케리는 냉소를 얹은 얼굴로 천천히 의자를 당겨 앉았다. 
“이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차분히 생각해 보시오.” 

칼로스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침묵했다. 한동안 그녀를 음산한 눈빛으로 뚫어지게 바라보던 케리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걱정하지 마오. 비밀은 내가 지켜 주지. 앞으로 잘하시면, 아무 일도 없을 거요.” 
협박이면서 동시에 달콤한 제안이었다. 

그 말은 그녀의 심장을 정확히 겨눈 두 얼굴의 말투였다. 바로 그 순간, 칼로스는 빠르게 안정을 되찾았다. 

'이건 또 하나의 거래다!' 
거래라면 그녀는 두렵지 않았다. 

칼로스는 마음을 다잡았다. 그리고 차분히 응답했다.
“먼저 원하시는 게 무엇인지, 조건부터 말씀해 주시지요.” 

그녀의 입가에는 어느새 잔잔한 미소까지 덧붙어 있었다. 

케리도 여유로운 표정이었다. 
그는 잠시 시선을 창밖으로 던졌다. 
그리고 모호하게 웃으며 천천히 말을 꺼냈다. 

“내 고향은 미시간주 트래버스시티 근처의 작은 마을, 인터라켄이오.” 
케리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깊었다. 

칼로스의 눈빛이 달라졌다. 그녀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이었다. 
“그곳은 자작나무의 고향이었소. 가을이면 자작나무 숲이 바람에 흔들리며 은빛으로 빛났지. 단풍은 노랗고 붉은 노을이 되어 호수 위를 덮었고, 새벽엔 물안개가 피어올랐소.” 

사진출처:픽사베이
사진출처:픽사베이

 

 

그는 잠시 눈을 감았다. 
“그 사이로 감미로운 첼로의 선율이 흘러나오곤 했지.” 

칼로스는 고개를 기울여야만 했다. 케리는 그녀의 표정을 훑어보며 말을 이었다. 
“그곳엔 세계적으로 유명한 인터라켄 예술학교가 있었소. 그곳 출신 졸업생들이 연출하는 축제는 세상 어디에도 없는 장관이었지.” 

그의 눈빛에 묘한 온기가 스쳤다. 
“요요 마가 첼로를 켰고, 노라 존스가 피아노를 연주했소. 미술관 한쪽에서는 젊은 화가 알렉스 로스가 스케치하고, 건축가 마야 린이 학생들과 함께 빛과 그림자의 구조를 강의했지.” 

그는 창밖을 바라보며 낮게 말했다. 
“그 시절, 예술은 공기처럼 그 도시를 감싸고 있었소.” 

칼로스는 속으로 짜증을 삼켰다. 
‘뭐야? 이 사람, 왜 갑자기 자기 고향 이야기를 이렇게 길게 하는 거지?’ 

그러나 지금은 내색할 수 없는 분위기였다. 
그녀는 억지로 미소 지어야했다. 
“정말 아름다운 도시네요. 언제 꼭 한 번 가 보고 싶어요.” 

그녀는 맞장구를 치며 귀를 기울이는 척했다. 케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밤이 되면 트래버스시티의 불빛이 호수 위에 출렁거렸소. 카지노의 네온사인 역시 그 물결을 타고 화려하게 반짝였지.”  

그는 말을 멈추었다. 그리고 그녀를 쳐다보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 빛은 황홀했지만, 어딘가 늘 불안했소. 예술과 욕망, 빛과 어둠이 함께 숨 쉬는 곳이었으니까.” 

칼로스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 그의 말에 빠져드는 자신을 느끼자 그녀는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유리창 너머의 불빛이 깜빡였다. 마치 그녀의 마음을 훔쳐보는 듯했다. 

‘두 얼굴의 사나이야.’ 
그녀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하긴 인생이라는 무대에서는 누구나 두 얼굴을 잘 버무려야 그나마 살아남는 법이지.’ 

바로 그때 케리의 시선이 그녀에게 닿았다. 
“세상은 언제나 두 얼굴이오.”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온기가 가득하던 얼굴에, 어느새 분노가 드리워져 있었다. 
“낭만만으로는 세상이 굴러가지 않소.” 

그는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인터라켄의 자작나무 숲속에서, 아버지는 작은 레스토랑을 운영하셨소. 그곳엔 늘 그 지역의 경찰서장, 세무서장, 기자, 검사가 단골이었지.” 

케리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낮고 무거운 목소리에 냉기가 감돌았다. 
“그들은 올 때마다 최고급 요리와 비싼 와인을 즐겼소.” 

그는 서늘한 얼굴에 장난기를 얹은 채 칼로스를 바라보았다. 
“칼로스, 계산은 누가 했을 것 같소?” 

‘뭐야. 이 자식, 사람 간 떨어지게 하더니, 갑자기…뜬구름 잡는 얘기는 또 왜 하는 거야! 아~ 정말 짜증 나!’ 

그러나 표정만큼은 흥미로운 척해야 했다. 
“음… 다들 한 권력이 있으니 쉽지 않네요. 제 생각엔 세무서장 같기도 한데.” 

그녀는 잠시 생각하는 척했다. 
“아니면 서로 번갈아 계산했을 것 같아요.” 

케리가 묵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틀렸소.”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언제나 우리 아버지가 냈었지.” 

칼로스는 짧게 웃었다. 
“호호호. 이해합니다. 참 재미있으면서도 울림이 있는 이야기네요.” 

케리는 그녀가 관심을 보인다고 생각한 듯 잠시 말을 멈췄다. 창밖으로 번지는 희미한 불빛이 그의 굳은 얼굴 위를 스쳐 지나갔다. 비틀린 입술에는 희미한 냉소가 걸려 있었다. 

“나는 그때 깨달았소. 돈이 없는 사람은 숨을 쉬고 있어도, 이 세상에선 그저 거리를 떠도는 좀비처럼 취급된다는 것을… 살아 있지만 존재감이 없고, 걷고 있지만 보이지 않는 사람들처럼.” 

그는 잔을 들었지만 마시지는 않았다. 오래전의 기억이 목구멍 어딘가에 걸린 듯, 그의 목소리는 낮고 건조했다. 

“하지만 아무리 돈이 신이 된 세상이라 해도, 결국 돈보다 앞서는 건 권력이오.” 
냉소를 걸친 그의 눈빛이 더 깊어졌다. 

“나는 그때 바로 깨달은 거요. 권력이 있어야 비로소 돈도 지켜진다는 사실을. 그래서 기를 쓰고 이 자리까지 올라왔지.”  

말을 멈춘 그가 가만히 그녀의 눈빛을 읽었다. 
‘마치 시인이나 성인군자처럼 말하더니, 결국 돈을 많이 달라는 이야기군. 그것도 내가 먼저 입을 열기를 기다리고 있어. 참으로 치사한 새끼군.’ 

그러나 그녀는 이미 계산을 끝낸 뒤였다. 파멸이냐. 생존이냐. 그 점에서 그녀의 선택지는 단 하나였다.  

그녀는 더 묻지 않았다. 단호하게 던졌다. 
“딱 절반, 50% 드리겠습니다.” 

케리는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가 너무 쉽게 말하자, 이미 넉넉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건 승자의 웃음이었다. 
“하하하. 감사한 말이오.” 

하지만 그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내가 절반을 받으면, 당신은 언젠가 내 등에 칼을 꽂으려 들겠지.” 

칼로스의 눈빛이 흔들렸다. 케리는 부드럽게 웃었다. 
“딱 10%만 주시오. 그 정도면 서로 오래 갈 수 있소.” 

그의 시선이 그녀를 붙잡았다. 
“어떻소, 내 제안?” 

칼로스는 깜짝 놀랐다. 
하지만 그 순간, 어처구니없게도 이 협잡꾼에게 감사한 마음마저 들었다. 

케리는 말을 이었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는 말이 있소. 하지만 지렁이가 꿈틀해 봐야 뭘 어쩌겠소.” 

그는 손가락으로 책상을 가볍게 두드렸다. 
“그러나 난 누구를 짓밟아 뭉개면서 나만 살려고 하지는 않소. 최대한 양보하면서 서로 상생의 길을 찾는 편이오.” 

칼로스는 자신도 모르게 입에서 아부하는 듯한 말이 터져 나왔다. 
“저도 ‘하늘은 땅을 품고, 바다는 강을 품는다’는 말이 생각나네요. 국장님은 정말 대인이세요.” 

그녀는 두 손을 공손히 모았다. 이제 그들 사이에서 누가 옳고 그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서로가 만족한 최상의 협상을 한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칼로스는 이 남자가 결코 평범한 자가 아님을 직감했다. 
상대의 숨통을 완전히 끊지 않는 것. 과한 욕심을 내지 않고 안전선을 확보하는 것. 

그것은 그가 지금까지 살아남은 고수의 생존 전략이었다. 

이제 그를 보는 그녀의 눈빛이 달라졌다. 
그때 케리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대의 이익에서 딱 10%요. 그리고 매월 말일에 정산합시다.” 

그는 거칠고 두툼한 손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그러나 내게는 정직해야 하오.” 

그녀는 케리의 손을 바라보았다. 
‘미스터 프롬펠. 날 의심하더니 결국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셨군요.’ 

의심은 언제나 신뢰의 또 다른 얼굴이었다. 

칼로스는 스스로 최상위 포식자라 믿고 있었다. 그러나 어느새 또 다른 상위 포식자가 그녀를 덮친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지존이 되어 버린 그에게 감사의 인사를 해야 했다.

그녀는 손을 내밀었다. 두 사람의 손이 맞잡혔다.
이미 그녀의 마음 한편에는 CIA 국장과의 은밀한 거래가 차갑게 계산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예상은 정확했다. 
CIA 국장이라는 직위가 가진 막강한 권력과 정보망은, 그녀의 거래가 막히거나 위험에 부딪힐 때마다 어김없이 나타나 간단하게 문제를 해결했다. 

“내가 정리하겠소. 우린 같은 배를 탔잖소.” 
언제나 그의 장담은 거짓이 아니었다. 

이제 그는 그녀의 기생충이 아니라, 꼭 필요한 해결사였다. 협박과 굴욕의 관계가 안전한 공생으로 바뀌어 버린 것이다. 

아이러니였다. 통제를 위해 투입된 자가, 오히려 통제권을 빼앗아 가고 있었다. CIA 국장 한트 케리는 칼로스와 은밀한 동맹을 맺고, 대통령 프롬펠을 농락하는 게임을 시작하고 있었다. 

어느 날, 칼로스가 먼저 한트 케리에게 만남을 요청했다. 
“미스터 프롬펠, 그의 욕심이 정말 끝이 없어요.” 

그녀는 답답함을 토로했다. 
“게다가 문제는 그 오만함이 더 큰 문제예요. 불과 몇 달 사이에 60억 달러를 챙겨 줬는데도, 이제는 제 말도 듣지 않고 막무가내로 우겨요.” 

케리는 조용히 웃었다. 
“바다는 메울 수 있어도, 사람 욕심은 메울 수 없다는 말이 있소.” 

그는 느긋하게 의자에 기대앉았다. 
“바로 그를 두고 하는 말이오.” 
또 성인군자 흉내였다. 

칼로스는 반색하며 맞장구쳤다. 
“네, 딱 맞는 말이네요. 참 말씀도 잘하세요. 호호호.” 

신바람이 난 케리는 의자를 당겨 앉으며 소곤대듯 말했다. 
“칼로스, 오늘은 솔직히 말하겠소.” 
그의 눈빛이 장난스럽게 빛났다. 

“내가 투자한다고 한 게 아니라, 그가 나를 투입한 거요.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이 있다면서 말이오. 그래서 나도 검색을 좀 해 봤지.” 
케리는 빙긋 웃으며 호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칼로스는 이미 짐작하고 있었지만, 그가 이렇게 대놓고 말할 줄은 몰랐다. 케리는 담배에 불을 붙이고 말을 이었다. 

“그런데 한국 속담 중에 이런 말도 있더군.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 

그는 연기를 깊게 빨아들인 뒤, 천천히 내뿜었다. 
“솔직히 말하면, 그가 가진 돈을 생각만 해도 내 배가 많이 아팠소. 하하하.” 

그의 웃음에는 짙은 질투와 자조가 섞여 있었다. 
“참 이상한 일이오. 원래 돈과 여자는 욕심을 내면 멀리 달아나는 법인데, 그 사람만은 예외였소. 게다가 덤으로 권력까지 손에 쥐었으니.” 

케리는 고개를 저었다. 
“그래서 내가 미치겠단 말이오.” 

그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니 한 번 크게 혼내 주시오. 내가 모른 척 눈감아 드리리다. 하하하.” 

칼로스의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네. 그렇게 말씀 주시니, 제가 한 번 크게 골탕 먹여야겠어요. 호호호.” 

 케리는 갑자기 손을 들어 말을 보탰다. 
“아, 참. 그 돈도 내 돈이 아니오. 나중에 큰돈 챙겨 준다고 말은 했지만, 난 그 사람에게 큰 기대는 안 하고 있소.” 

칼로스는 측은한 표정을 지었다. 
“그건 정말 몰랐네요. 결국 이용만 당하셨군요.” 

케리는 말없이 휴대전화를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 
“며칠 전 그가 감청 장비를 설치했소. 우리도 감시의 대상이오. 앞으로 나와 통화할 때는 이 전화로만 하시오.” 

칼로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늘 조심하고 있습니다만, 명심하겠습니다.” 

케리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지금이 매우 조심해야 할 때요. 그는 밤 8시 전후에 감청하는 버릇이 있소.” 

그는 그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 시간대에는 오히려 우리 기존 전화번호로 통화하며 환심을 잔뜩 사야 하오. 내가 봤을 땐 앞으로 딱 일주일이 고비요.” 

그건 그에게 이미 해답이 나온 방정식이었다. 

칼로스는 그를 추켜세웠다. 
“역시 빈틈없으시군요.” 

케리는 어깨를 들썩이며 윙크했다. 
“그는 사람을 다뤄 본 경험이 많은 사람이오. 또 입버릇처럼 ‘거짓은 언제나 완벽한 충성 속에 숨어 있다’고 하며 늘 의심하고 감시하는 사람이오.” 

그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우린 그걸 역이용하는 거요. 하하.” 

역시 그의 촉은 남달랐다. 그녀가 웃었다. 
“제가 국장님을 만난 것도 행운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걸 전화위복이라 한답니다. 호호.” 

그러나 그녀의 웃음은 짧았다. 방 안에는 묘한 정적이 흘렀다. 마치 서로의 다른 속셈이 공기 속에 떠다니는 듯했다. 

잠시 뒤, 그녀는 아무 일 없다는 듯 커피잔을 들어 올렸다. 그러나 그 잔에는 아직도 짙은 경계의 향이 남아 있었다. 

다음 날 저녁. 백악관 지하 통신감청실. 
프롬펠은 보안실의 문을 직접 열었다. 그 방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단 세 명뿐이었다. 

문이 닫히자, 내부의 어둠이 그를 삼켰다. 모니터 수십 대가 어둠 속에서 푸른 빛을 토해 내고 있었다. 
각국의 통신망, 음성 파형, 암호화된 데이터 흐름이 화면 위에서 조용히 움직였다. 

프롬펠은 의자에 앉아 잠시 숨을 골랐다. 
그리고 노트북 한 대를 열었다. 
화면에는 코드명이 깜박였다. 

INTERCEPT-K. 

‘흐흐. 의심은 나의 종교이고, 검증은 나의 예배야.’ 
그는 근엄한 심판관의 얼굴로 헤드셋을 집어 들었다. 

그 동작만으로도 권력의 무게가 느껴졌다. 
‘케리, 넌 내게 너무 완벽했어.’ 

프롬펠은 중얼거렸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사람 속은 모른다고 했잖아. 게다가 돈 앞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지.’ 

그는 헤드셋을 썼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그리고 모니터의 파형을 주의 깊게 살폈다. 그는 참으로 오랜 시간 끈질기게 앉아 있었다. 마침내 화면의 음파 그래프가 춤추듯 흔들리기 시작했다. 

프롬펠은 다시 헤드셋을 썼다. 
그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 귀를 기울이던 그의 얼굴에 서서히 미소가 번졌다.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갔다. 

이윽고 그는 휘파람을 불며 벌떡 일어섰다.  

그날 밤, 워싱턴의 밤하늘은 이상하리만큼 고요했다. 바람도, 별빛도 모두 고요히 잠들어 있었다. 

대통령 프롬펠의 철저한 검증까지 통과한 두 사람. 
칼로스와 한트 케리. 
그들은 이제 더욱 안전하게 공존하는 기생의 구조를 완성했다. 

그들이 돈을 빨아들이는 숙주는 오직 한 사람. 
세계 최강국 미국의 대통령, 알프레드 프롬펠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도 모르게 그들의 손바닥 위에서 춤추는 인형으로 변하고 있었다. 

한트 케리 역시 완전히 믿을 수 있는 인간은 아니었다. 
그는 매월 말일이면 여지없이 나타나 계좌 잔고와 그간의 거래 내용을 하나하나 확인했다. 
그리고 약속한 돈을 받아 갔다. 

그도 프롬펠과 다를 바 없었다. 그 역시 의심을 신앙처럼, 검증을 의식처럼 여겼다. 다만 그는 조금 더 부드럽고, 조금 더 오래 기다릴 줄 알았다. 

오직 그 차이였다. 

그러던 어느 날, 한트 케리가 칼로스에게 또 다른 제안을 했다. 이번에는 그녀의 사촌 동생 크리스티나에 관한 일이었다. 
“그 아이, 가수가 되고 싶다 했지?” 

칼로스가 그를 바라보았다. 케리는 부드럽게 웃었다. 
“그 대신, 내가 아주 유능한 직원 세 사람을 추천해 줄 수 있소.” 

그건 제안이 아니었다. 
지시였다. 

그 후 크리스티나는 가수의 길을 택했다. 칼로스의 재정적 지원, CIA 국장의 보이지 않는 손, 그리고 대통령의 그림자까지 더해지자, 그녀는 빠르게 입지를 다져 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첫 노래가 방송을 탔다. 
〈Happy Life〉. 행복한 인생. 

맑고 가벼운 멜로디가 도시의 밤 위로 흘러나왔다. 그 노래의 첫 소절이 사람들의 귓전에 도달하는 순간, 그들의 운명은 이미 다른 방향으로 굴러가기 시작했다. 

가수로서의 명성은 빠르게 찾아왔다. 

하지만 그들의 세계에서 공짜로 얻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고 행복한 인생이라는 노래 제목과 달리, 그 노래가 불러올 것은 행복이 아니었다.
그것은 파멸의 전주곡이었다.

☞[데칼코마니 신들의 화폐 - 제11화 또 다른 나]로 이어집니다.

바이러시아 buyrussia21@buyrussia21.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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