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 Sep 2026

연재 소설) 데칼코마니 신들의 화폐 - 제 13화 반딧불이의 숙명

한반도 위기를 촉매재로 삼아 한-미 양국의 최고위층에서 벌어지는 카지노 자본주의, 국가 권력이 금융시장의 핵무기 격인 파생상품으로 '잭팟'을 노리는 거대한 음모를 담은 본격 추리 소설 '데칼코마니-신들의 화폐'를 작가의 양해를 얻어 연재한다.  

☜이 소설은 한반도 위기를 모티브로 한 가상의 추리 소설이며, 등장 인명·지명·기관·사건 등은 사실과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데칼코마니 신들의 화폐 -제 12화 해변의 비밀]]에서 계속 

[데칼코마니 신들의 화폐 -
제 13화 반딧불이의 숙명]

 

최상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조용히 물결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러던 그가 입을 열었다. 

“바로 그것입니다. 그것이 동지의 운명이오.” 

동혁은 고개를 들었다. 상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이상하게 피할 수 없는 힘이 있었다. 

“동지는 별과 반딧불이를 좋아하시지요?” 

동혁의 눈빛이 흔들렸다. 
‘갑자기 별과 반딧불이 얘기를?’ 

동혁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상호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별. 그리고 반딧불이, 모두 영롱한 빛이 있기에 사랑받는 것입니다. 반딧불이는 오랜 인고의 세월을 견뎌 낸 뒤에야, 비로소 황홀한 빛으로 세상을 밝히지요.” 

그의 시선이 하늘로 향했다. 그리고 숨을 고른 후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 빛이 있기에 사랑도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반딧불이는 다른 생명을 잡아먹지 않습니다. 그래서 더 고결하지요.” 

동혁은 자신도 모르게 그의 말을 듣고 있었다. 상호는 말을 멈추었다. 호수 위로 바람이 지나가고, 잔물결이 희미하게 번졌다. 

“동지 역시 그런 삶을 동경하지 않습니까? 억울하게 죽은 가족들과 지금도 힘겹게 살아가는 모친을 생각하면, 이제 동지가 그 찬란한 빛이 되어야 할 차례입니다.” 

동혁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냥 두려웠다.  
이 남자는 자신에 대해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너무 깊이 알고 있었다.  
마치 오래전부터 자신을 뒤따라온 그림자처럼. 

상호의 목소리가 다시 이어졌다. 
“동지의 여러 친구가 동지를 설득해 달라고 했소. 만약 동지가 자수하면, 모든 동지를 배신하는 것이며, 결국은 간첩죄를 뒤집어쓰게 됩니다.”  

그 순간, 그의 말은 서늘한 비수처럼 동혁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심장이 내려앉고 눈앞이 캄캄해졌다.  

‘간첩죄.’ 

그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건 결코 피할 수 없다.’ 

머리를 쥐어짜며 부정해 보려 했다. 
'아니라고. 나는 몰랐다'고. 
'나는 그저 기부금이라고 하니, 받았을 뿐'이라고.하지만 과연 누가 믿어 줄 것인가. 

도피 중인 수배자. 
북쪽 돈.
영수증. 

그 모든 것이 한꺼번에 동혁을 죄인의 자리로 밀어 넣고 있었다. 
어머니가 오열하며 쓰러지는 모습, 혜경의 절망과 탄식이 겹쳐 떠올랐다. 억눌렸던 울음이 신음처럼 터져 나왔다. 

상호는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호수 위에 잔잔한 바람이 불었다. 미세한 물결이 일었고, 그의 시선도 잠시 흔들렸다. 그러나 그는 곧 다시 입을 열었다. 

“아, 참. 동지는 아카시아꽃도 좋아하시지요?” 
흐느끼던 동혁은 또다시 말문이 막혔다. 놀라움이 두려움을 밀어냈다. 
상호는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아카시아의 꽃말은 플라토닉 러브. 오직 사랑이지요. 수줍게 고개 숙인 채 은은한 향으로 사람을 매료시키는 꽃. 첫사랑을 닮은 꽃입니다.” 

동혁의 눈앞에 혜경의 얼굴이 떠올랐다.
뽀얀 얼굴. 은은한 눈망울. 해맑은 미소. 아카시아 꽃향기와 같았던 그녀.

상호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난 별을 사랑하고, 반딧불이와 아카시아꽃을 좋아하는 그런 낭만적이고 순수한 동지를 결코 해치고 싶지 않습니다.” 

잠시 침묵이 흐르면서, 그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스쳤다. 
“나 역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지금은 그저 운명과 숙명을 따르고 있는 것뿐입니다.” 

동혁의 눈빛이 흔들렸다.
‘이 사람, 간첩치고는 꽤 감성적이다.’

그 순간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동혁의 마음속에서 강한 적대감이 아주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낯선 평온이 그 자리를 비집고 들어왔다. 두려움과 경계 사이로, 알 수 없는 친밀감이 스며들고 있었다.

그러나 바로 다음 순간, 상호는 동혁이 가장 아파하는 곳을 찔러왔다. 
“동지가 자수하면, 아카시아꽃 같은 착하고 예쁜 혜경 씨의 인생 또한 매우 불행해질 것입니다.”

동혁의 얼굴이 다시 굳어졌다. 상호는 그를 외면하며 한 마디를 더 던졌다. 
“그녀도 간첩 혐의는 피할 수 없어요.” 

동혁은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주먹이 저절로 쥐어졌다.
혜경.
그 이름이 나오자 그의 심장은 다시 무너졌다. 상호는 여전히 태연했다. 잠시 후, 그가 툭 내뱉듯 말했다. 
“… 그녀를 진정 사랑한다면, 보호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동혁은 숨을 삼켰다. 그 말은 협박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피할 수 없는 진실처럼 들렸다.

‘그래. 그녀를 떠나야만 한다.’ 
첫사랑.
그녀의 포근한 품. 
그토록 간절히 붙잡고 싶었던 단 하나의 온기.

그것을 다시 놓아야 한다는 생각이, 그의 가슴을 찢어 놓았다.
‘내겐 사랑조차 죄다. 이 무정한 세상. 이 잔인한 세월.’ 

절망과 공포가 한꺼번에 밀려왔다. 

동혁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저 한숨만 내쉬었다.
상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에게 동지의 사정을 전할까요? 그녀는 물불을 가리지 않고 뛰어들 것입니다. 그건 동지가 더 잘 알고 있겠지요?” 
“안 돼요! 안 됩니다. 그건 절대 안 됩니다!” 

동혁은 비명을 지르듯 소리쳤다. 애절한 눈빛으로 간청했다. 짧은 정적이 흘렀다. 끝내 동혁은 고개를 떨구었다.

‘난 이미 거대한 덫에 갇혔다.’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빠져나갈 길은 없다.’ 

그는 털썩 주저앉았다. 
상호는 그 모습을 내려다보다가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냈다. 불을 붙였다. 깊게 들이킨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회색 연기가 허공에 흩어졌다. 손끝의 담배 불꽃이 바람에 흔들렸다.

잠시 후, 낮고 건조한 목소리가 다시 이어졌다. 
“그녀는 동지를 기다릴 것입니다.” 

사진출처:픽사베이.com
사진출처:픽사베이.com

 

 

상호는 호수 위로 시선을 던졌다.
“그러니 동지가 어서 빨리 그 찬란한 빛이 되는 것입니다.”

호수 위에 떨어진 햇살이 잘게 부서지고 있었다.

상호는 다시 입을 열었다. 
“짐작하겠지만, 난 사상과 신념이 옹골찬 사람은 누구든 지원하고 있소.”

그는 이름들을 하나씩 말했다. 
“상면, 영배, 재웅, 상곤, 은희 동지… 더 얘기해 드릴까요? 물론 지원을 거절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지금의 동지처럼 말이오.”

동혁은 여전히 주저앉은 채 어깨를 들썩이고 있었다. 울고 있었다. 
최상호는 천천히 몸을 낮추었다.
“하지만 불편한 진실은 알고도 모른 척하는 것이 최고요.”

그의 목소리가 더 낮아졌다.
“금기된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순간, 모두에게 공멸이 올 뿐이오.”

그는 바싹 가까이 다가와 덧붙였다.
“지금 이 시간, 많은 동지가 그대와 함께하고 있다는 것. 그것만이 중요한 것이오.”

그의 눈빛이 차갑게 빛났다. 
“지금 동지에게 무엇이 남아 있소?” 

동혁은 대답하지 못했다.
“든든한 부모가 있소?”

그의 목소리는 가혹했다.
“희망찬 미래가 있소?”

잔잔하던 호수 위로 메마른 잎사귀 하나가 힘없이 흩날렸다.
최상호가 그것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 대한민국에 귀하가 편히 쉴 곳은, 그 어디에도 없소. 그대의 삶은 저 메마른 낙엽과 다를 바 없지 않소.”

동혁은 부정할 수 없었다. 그 말은 냉엄한 현실이었다.
상호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자유와 정의, 그 신념의 대가는 오로지 참담한 현실과 암울한 미래뿐이오.” 

그의 목소리에는 이상한 설득력이 있었다.
“흘러가는 시대의 흐름에 순응하시오. 머잖아 동지도 마음을 열고 먼저 손을 내밀 것이오.” 

그는 담배를 내려다보았다.
“도와 달라고. 동지의 여러 친구가 그리하였듯이 말이오.”

짧은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은 쇳덩이처럼 동혁의 가슴을 눌러왔다. 
동혁은 숨이 막혀 왔다.
그때 갑자기 최상호가 고개를 돌렸다. 목소리가 낮아졌다. 
“저기, 누가 다가오고 있소. 얼른 고개를 드시오.”

바로 그 순간이었다. 동혁의 찌가 쑥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왔다.
그러더니 다시 물속으로 잠겼다. 그 찌가 잠수하는 순간, 동혁의 영혼도 함께 깊은 어둠 속으로 가라앉는 듯했다.  

옆자리 낚시꾼이 다가와 손짓하며 소리쳤다.
“거기! 거, 빨리 올리세요!”
그제야 동혁은 낚싯대를 잡아챘다. 

낚싯대가 크게 휘었다. 
“아, 또 대물이야. 분명해!”

동혁이 힘겹게 끌어올린 것은 두 자가 넘는 큰 잉어였다. 낚시꾼은 부러운 눈으로 한참 바라보다가 돌아섰다. 동혁은 잠시나마 자신의 시련을 잊은 듯, 멍한 눈으로 잉어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가만히 놓아주었다.
잉어는 수면을 치고 사라지다가, 다시 되돌아왔다.
마치 감사를 표하듯 꼬리를 세차게 흔들고는 물속으로 사라졌다.

상호가 웃었다.
“여기 잉어는 모두 은혜를 아는 듯하오.”

그의 웃음이 호수 위로 번졌다. 
“한낱 미물도 은혜를 아는 것이오. 하하하.”

하지만 동혁은 웃지 못했다. 그저 멍하니 호수를 바라볼 뿐이었다.
최상호의 목소리가 다시 낮아졌다. 
“살다 보면 절망에 빠질 때가 있소.”

그는 담배를 비벼 껐다.
“그럴 땐 악마의 손이라도 잡아야 하오. 적의 어깨에라도 기대야 살아남고, 살아남아야 다시 기회를 잡는 것이오.”

그 말은 위로처럼 들렸다. 그러나 피할 수 없는 선고였다.
그때 또 상호가 말했다. 
“앞으로 우리는 그대에게 그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을 것이오. 그 어떤 간섭도 하지 않을 것이오. 그대의 삶, 그 자체가 바로 영웅이오.”

그 말이 떨어지자, 동혁은 얼룩진 얼굴을 꼿꼿이 쳐들었다.
“정말… 바라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까?”

그는 최상호의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확실한 다짐을 받고 싶었다. 

상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그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그대는 지금처럼, 주어진 운명에 충실하기만 하면 되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나는 다만… 먼 훗날 한반도의 영원한 번영을 위해, 오늘의 악연이 내일은 소중한 인연이 되었으면 하오.”

동혁은 낮은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정연 씨도…?”

정연의 이름이 나오자, 상호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는 다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한 모금 깊이 빨아들인 뒤,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그제야 입을 열었다.
“우연히 길을 가다가 교통사고를 목격했소.”

그의 목소리는 달라져 있었다.
“한 어린아이가 이미 숨이 끊어진 할머니를 마구 흔들며 목 놓아 울고 있었소.”

동혁은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 아이가 여덟 살 때의 일이오.”

상호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담배 연기가 그의 얼굴 앞에서 천천히 흩어졌다.
“그때 난, 사고 현장에서 사람들이 나누는 말을 엿들었소. 그 아이가 일곱 살 때 부모는 교통사고로 모두 죽고, 오직 외할머니와 단둘이 살고 있었다고 하더군.”

갑자기 그의 시선이 하늘로 올라갔다. 동혁의 눈빛도 함께 흔들렸다.
최상호는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이 맑은 하늘이, 불과 1년 만에 그 불쌍한 어린아이에게 또 세상이 무너지는 날벼락을 날린 거요.”

그의 목소리가 다시 잠겼다.
“그날 그 사고 현장. 온 세상을 찢어 놓는, 그 작은 아이의 처절한 울음소리.”  

그는 말을 멈추고 다시 연기를 내뿜었다.
“그 시멘트 바닥에, 할머니가 흘린 피와 뒤섞인 그 작은 아이의 뜨거운 눈물.”

상호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그 기억은 아직도 그날의 피 냄새처럼 그의 심장을 조여 오는 듯했다. 
“난 그때, 그 아이의 눈에서 절망을 봤어요.” 

동혁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 눈빛에서 그 아이의 암울한 미래를 봤소. 난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소.” 

상호가 동혁을 쳐다보며 말했다.
“이걸 우리 공화국이 알면, 난 즉시 처형이오.”

동혁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정말… 불쌍하고 가엾네요.”

그의 마음속에서 상호를 향한 적대감이 조금 더 누그러졌다.
‘이 사람, 어쩌면 좋은 사람일지도 모른다.’ 

상호가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혜경 씨가 아카시아꽃이라면, 정연은 백합이지요.”

상호의 눈빛이 되살아났다.
“백합의 꽃말은 순결, 그리고 변치 않는 사랑입니다.”

동혁은 정연의 얼굴을 떠올렸다. 말수가 적고, 감정을 쉽게 드러내지 않던 그녀.
그러나 그 눈빛 깊은 곳에 늘 촉촉이 젖은 슬픔이 깔려 있던 그녀.
“그녀는 말수가 적고 감정을 드러내지 않아요.”

상호가 말했다.
“그 작은 아이가 세상이 무너지는 날벼락을 두 번이나 맞았으니….”

동혁이 말했다.
“어쩐지 그녀에겐 언제나 슬픔이 묻어 있었습니다.”

이제 상호는 더 이상 적이 아니었다. 동혁은 어느새 그를 막내 삼촌처럼 느끼고 있었다.

상호가 자신의 마음을 고백했다.
“그 아이를 만나기 전의 나는, 곧 체포되어 고문당하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거라는 예감에 매일 두려움에 떨고 살았소.”

그의 목소리는 가식이 없었다.
“그런데 그 아이의 맑은 눈빛을 보게 되면서, 나를 짓누르던 공포가 순식간에 녹아내렸어요.”

상호의 눈가가 붉어졌다.
“지금 그 아이는 내 목숨보다 더 소중한 아이요.”

동혁의 눈빛에 연민이 번졌다.
상호가 씁쓸하게 웃었다.
“그 아이가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궁금하겠지요. 내가 누구인지. 어디서 왔는지. 왜 자신을 도왔는지. 하지만 때로는 외면과 순응이 안식과 평화를 가져옵니다.”

그가 동혁을 쳐다봤다. 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참 총명한 아이 아닌가요? 큰 나쁜 일 없이 그저 소소하게 사는 것이 가장 큰 행복이라고 생각하는 아이지요.”

그가 시선을 돌려 하늘을 쳐다보며 말했다. 
“착한 아이입니다. 날 친삼촌처럼… 아니, 친아버지로 생각하고 있어요.”

어느새 그의 눈이 붉게 물들었다. 그는 또 한 모금의 담배를 깊이 들이마셨다. 마치 가슴속에 쌓인 응어리를 뿜어내듯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연기는 바람을 타고 허공으로 흩어졌다. 

한동안 말없이 하늘을 올려다보던 최상호가 다시 시선을 거두었다.
“나는 그 아이를 딸이라 생각하고… 내가 잘못되면 북조선의 가족과 남조선의 딸이 모두 잘못되는 것입니다.” 

그는 숨을 들이켰다. 목소리가 떨렸다. 
“그걸 생각하면 곧바로 온몸에 소름이 돋습니다. 이런 것이 나라는 사람의 존재 이유이자, 사상과 신념을 떠나 그저 열심히 살아야 하는 동력입니다.”

그는 주저앉아 있는 동혁에게 손을 내밀었다.
“자, 내 손을 잡고 일어나시오.”

동혁은 엉거주춤 손을 내밀었다. 상호는 힘을 주어 그를 일으켰다.
그리고 동혁의 어깨에 두 손을 얹었다.
“어깨를 활짝 펴시오.”

그의 목소리는 단단했다.
“난 오늘, 양쪽에서 총살당할 말을 그대에게 실토했소.”

동혁은 그를 바라보았다.
“이제 동지가 나와 정연을 고발하면 면죄부를 받을 거요. 그리고 평생 돈 걱정 없이 살 수 있는 엄청난 포상금도 받을 것이오.”

상호는 담담한 얼굴로 동혁의 눈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동혁이 낮게 말했다.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상호의 눈빛에 미세한 떨림이 일었다. 

“선택지는 오직 동지에게 있소.”
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동지가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그건 내가 감당할 일이오. 하지만 정연은 다르오.”

그는 잠시 숨을 들이마셨다.
“만약의 경우에도, 그 아이만은 꼭 지켜 주시오. 더 이상의 날벼락만은 피하게 해 주시오.”

그 순간이었다.
상호의 눈빛이 갑자기 날카롭게 바뀌었다. 갑자기 낚싯대를 거두었다.
그리고 낚시 가방을 챙기기 시작했다.

“빨리 낚싯대를 챙겨 천천히 따라 나오시오.”

동혁은 긴장했다. 멀리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낚시터 입구 쪽으로 경찰들이 들이닥치고 있었다.  

검문이 시작됐다. 동혁이 반사적으로 도망치려 하자, 상호가 그의 팔을 붙잡았다.
“가만.”

그는 낮게 말했다.
“이걸 꽉 잡고, 그냥 앞으로 걸어가시오.”
상호는 동혁의 손에 팽팽한 낚싯줄을 쥐여 주었다. 동혁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줄은 곧 끊어질 것처럼 팽팽했다. 그는 그 줄을 잡은 채 몇 발짝 앞으로 나아갔다.

그 순간.
틱.
아주 미세한 소리가 들리며 줄이 끊어졌다.
그리고 섬광이 터졌다.
우르릉. 쾅!
거대한 굉음이 호수를 뒤흔들었다.

동혁은 깜짝 놀라 뒤돌아보았다.
호수 중앙. 조금 전 상호가 떠나왔던 그 방갈로가 폭발해 순식간에 화염에 휩싸이고 있었다. 
불길이 치솟고, 검은 연기가 하늘로 올라갔다.

동혁은 망연자실한 얼굴로 서 있었다. 
그의 손에는 아직도 끊어진 낚싯줄이 쥐어져 있었다.

상호가 그의 어깨를 툭 쳤다.
“동지.”

그는 빙긋이 웃으며 태연하게 말했다.
“도대체 어디 쓰려고 아직도 그걸 꼭 붙들고 있소?”

그 말에 혼이 나갔던 동혁이 겨우 제정신을 차렸다.
갑작스러운 폭발에 경찰들이 일제히 몸을 낮추었다. 누군가는 호수 중앙을 가리키며 소리를 질렀고, 누군가는 무전기를 붙잡고 외쳤다.

곧 배가 도착했다.
몇몇 경찰은 급히 배를 몰아 폭발 장소로 향했다. 

그 혼란 속에서도 상호는 미소를 머금고 동혁을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두 손으로 자신의 입을 가리고, 호수 가장자리에서 폭발 지점을 바라보던 경찰들을 향해 크게 외쳤다.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경찰 한 명이 소리쳤다.

“여긴 위험하니 빨리 피하세요!”
상호는 능청스럽게 또 소리쳤다. 
“네! 그럼 수고하세요!”
그는 그렇게 경찰들과 큰 소리로 화답하며 유유히 낚시터를 빠져나갔다. 

그 담대한 뒷모습을 보며, 동혁은 조금 전과는 전혀 다른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 사람, 보통 사람이 아니다.’

상호가 빙긋이 웃으며 동혁의 어깨를 툭 쳤다. 
동혁은 그제야 길게 숨을 내쉬었다.

두 사람은 여유로운 걸음으로 낚시터를 빠져나왔다. 
동혁의 어깨에는 조금 전 상호가 건네준 작은 낚시 가방이 걸려 있었다.
묵직했다.
그 무게는 단순한 돈의 무게가 아니었다.
그것은 더 이상 거절할 수 없는 운명의 무게였다.

그리고 그 운명은 또 다른 시작을 예고하고 있었다.

☜제 14화 -메마른 낙엽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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