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부 유럽의 정치 지형도가 달라졌다.12일(현지시간) 치러진 헝가리 총선에서 오르반 빅토르 총리(헝가리는 한국처럼 성+이름 순으로 표기한다. 지금까지는 영어식으로 빅토르 오르반으로 써왔다. 연합뉴스가 표기법을 불쑥 바꿨다/편집자)가 이끄는 여당이 참패했다.
이에 따라 무려 16년간 집권한 '리틀 트럼프' 혹은 '유럽의 트럼프'로 불린 오르반 총리도 권좌에서 물러나게 됐다. 그는 친(親)러시아 성향으로 유럽연합(EU) 내부에서 사사건건 대(對)러시아 제재 조치에 시비를 걸었는데, 헝가리 새 정부는 EU의 대러 정책에 협조할 것으로 전망된다.
그러나 중부 유럽에는 친(親)러 성향의 정치 지도자가 한 사람 더 있다. 로베르트 피초 슬로바키아 총리다. 그는 오르반 총리와 함께 지난달(3월) 19일 EU 정상회의에서 2년간에 걸쳐 우크라이나에 900억 유로를 대출하겠다는 공동 성명에 서명을 거부하는 등 EU의 대(對)우크라 정책에 제동을 걸었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헝가리·슬로바키아가 러시아산 석유를 수입하는 육상 통로인 '드루즈바 송유관'을 우크라이나가 막아버렸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우크라이나는 자국 영토를 통과하는 드루즈바 송유관이 러시아군의 공습으로 손상됐다며 올해 초 운영을 중단했다. 헝가리와 슬로바키아 두 나라는 내륙국가여서 해상으로 석유 수입이 불가능하다.
중부 유럽에 위치한 헝가리. 북쪽으로는 슬로바키아, 서쪽으로는 오스크리아, 동쪽으로는 우크라이나, 남쪽으로는 세르비아 루마니아 등으로 둘러싸인 내륙국가다/출처:네이버 해외정보
13일 헝가리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따르면 개표율 97.74% 기준으로, 야당 티서(대표 머저르 페테르)가 전체 199석 중 138석을 차지하고, 여당인 피데스는 55석을 확보하는 데 그쳤다. 티서당은 헌법 수정이 가능한 133석(전체 의석의 3분의 2) 확보를 목표로 내세웠으나 실제로는 5석이나 더 많이 차지하는 완승을 거뒀다.
우크라이나 매체 스트라나.ua는 13일 하루를 정리하는 기획 기사 중 '오르반이 떠난다. 헝가리 총선의 결과' (Орбан уходит. Что показали выборы в Венгрии) 라는 코너에서 "티서당이 '헌법상 다수'(конституционное большинство, 헌법 수정이 가능한 3분의 2, 전체 의석 199석 중 133석/편집자)를 확보해 정부를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다"며 "16년간 집권했던 오르반 총리는 야당으로 밀려날 처지"라고 전했다.
대체적으로 헝가리의 이번 정권 교체에 EU가 환호하고, 우크라이나는 입이 귀에 걸리고(웃고), 러시아는 고개를 돌린다(실망)는 평가가 나온다. 특히 EU와 우크라이나는 그동안 오르반 총리가 막아온 대(對)우크라 차관 900억 유로에 대한 집행이 조기에 가능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실제로 총선을 승리로 이끌고 한 달 내 총리에 취임할 것으로 예상되는 머저르 페테르(러시아어로는 Петер Мадьяр, 페테르 마쟈르다. 연합뉴스가 머저르로 쓰기 시작했는데, 그렇다면 오르반도 오르번으로 써야 한다/편집자) 피서당 대표는 13일 총선 승리후 첫 회견에서 "우크라이나에 대한 900억 유로 대출은 헝가리가 참여하지 않는 상태에서 집행하기로 이미 결정됐으며, 이를 굳이 변경할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오르반 총리가 그동안 행사해온 거부권을 취하하겠다는 뜻이다. 오르반 총리와 행동을 같이 해온 피초 슬로바키아 총리가 동의한다면, EU의 우크라이나 대출은 내달(5월)부터 가능할 전망이다.
스트라나.ua는 "머저르 대표는 이미 여러 차례 우크라이나 문제를 포함해 향후 헝가리의 대외정책 방향을 제시했다"며 "그는 오르반 총리의 대(對)우크라 정책에서 완전히 벗어날 계획은 없어 보인다"고 분석했다.
우선, 우크라이나의 EU 조기 가입을 머저르 대표는 반대했다. 그는 "우크라이나의 EU 가입은 앞으로 10년 안에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며 그 이유로 △전쟁 중인 국가를 EU에 가입시키는 것은 부당하고 △가입 협상을 조기에 끝내는 것이 불가능하며 △대다수 EU 회원국들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여기는 점 등을 들었다. 그는 또 "우크라이나가 EU 가입 협상및 과정을 완료하더라도 헝가리는 이에 대한 국민투표를 실시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특히 그는 "우크라이나 거주 헝가리계 주민들의 처우 문제 등 이웃 나라(우크라이나)와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다"며 날을 세웠다. 대표적인 게 헝가리어의 사용이다. 우크라이나가 2017년 초·중등학교의 고학년부터 우크라이나어만 사용하도록 의무화하면서 헝가리와 갈등이 깊어졌다. 전쟁 발발후 우크라이나 정부가 러시아어 사용을 엄격히 통제하는 바람에 헝가리어 등 다른 소수 민족들의 언어 사용도 덩달아 위축됐다.

또 러시아와의 실질적인 협력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머저르 대표는 헝가리 일간지 네프사바와의 인터뷰에서 "러시아와 헝가리의 지리적 위치는 변하지 않을 것이고, 러시아 에너지 의존 역시 그대로 유지될 수밖에 없다"며 "러시아와 협상 테이블에 앉을 것"이라고 약속했다. 그러나 "푸틴 (대통령)이 전화하면 받겠지만, 먼저 전화하지는 않겠다"고 선을 그었다. 또 "만약 통화하게 된다면 '벌써 4년이 지났으니 이제는 전쟁을 끝낼 때'라고 말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티서당의 총선 승리가 굳어지자 드미트리 페스코프 크렘린 대변인은 13일 "헝가리의 총선 결과를 존중하며, 모스크바와 부다페스트 간의 접촉이 지속되기를 기대한다"며 "(출범할 새 정부가) 러시아와 대화에 나설 의지가 있다는 발언을 들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러시아에게 재재를 가하는) 비우호적인 국가에게는 축하 메시지를 보내지 않는다"며 머저르 대표의 승리를 공식적으로 축하할 마음이 없음을 내비쳤다. 그는 '모스크바가 오르반 총리와는 우호적인 관계가 아니냐'는 한 기자의 질문에 "우리는 그와 대화를 나눴다"고만 했다.
마자르 대표도 이후 "러시아가 헝가리 유권자들의 선택을 존중하고 새로운 헝가리 정부와 협력하기로 동의해 준 것"에 대해 감사의 뜻을 표시하면서 "우리는 러시아와 실질적인 협력을 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했다.
안드리 시비가 우크라이나 외무장관은 이날 "총선 일정이 끝나 헝가리 여행을 자제하라는 권고를 해제한다"면서 "키예프는 새 헝가리 정부와 관계 정상화를 기대하고 있다"고 '러브 콜'을 보냈다.
우크라이나 전쟁을 보는 머저르 대표의 시각은 오르반 총리와는 180도 다르다. '전쟁의 피해자는 우크라이나'라는 EU의 평가와 같다. 그래서 그는 "누구도 우크라이나에게 평화 협정, 협상 조건을 강제할 수는 없다"며 "어떤 나라에게도 영토를 포기(우크라이나의 돈바스 포기/편집자)하라고 요구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도 "헝가리에 친(親)우크라 정부가 들어서는 것을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했다.
스트라나.ua에 따르면 머저르 대표는 오르반 총리처럼 러시아에 대한 EU의 추가 제재(헝가리에 대한 석유 및 가스 공급과 관련된 조항이 아닌 경우)를 막지 않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하지만 EU의 900억 유로 차관 승인과 새로운 제재 모두 헝가리와는 무관한 다른 이유로 차질을 빚을 수도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우선, 호르무즈 해협 봉쇄와 이에 따른 국제 유가의 급등은 EU의 대(對)우크라 차관 제공과 대(對)러 추가 제재에 대한 지정학적 여건을 변화시킬 수 있다. 에너지난을 이유로 유럽에서 러시아산 석유·가스의 구매 재개라는, 대러 제재와는 다른 방향으로 논의가 흘러갈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악화하는 유럽의 경제및 재정 여건을 감안할 때, 우크라이나에 대한 대규모 자금 지원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커질 가능성도 있다.
특히 피초 슬로바키아 총리는 드루즈바 송유관 문제가 원할하게 해결되지 않는 한, 오르반 총리를 대신 대(對)우크라 차관을 봉쇄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또 다른 이유로는 트럼프 미 대통령의 감정적 대응을 들 수 있다. 그가 적극적으로 연임을 밀었던 오르반 총리가 정부 수반에서 물러난 뒤 EU에 대한 트럼프 대통령의 분노는 더 거세지고, 그 결과 미국의 나토(NATO) 탈퇴나 유럽 주둔 미군의 감축과 같은, 새로운 안보 위험 여건이 만들어질 수 있다. 앞으로 미국과 유럽 간의 갈등이 고조될수록, 미국의 대(對) 우크라 무기 및 군사 정보 제공은 줄어들고, EU의 행동 반경도 좁아질 수밖에 없다. 우크라이나에게는 최악의 시나리오가 된다.
미국의 정치전문 매체 폴리티코는 머저르 대표의 발언을 분석한 뒤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에게는 티서당의 총선 승리가 다행스러우면서도 씁쓸할 것"이라며 "키이우에 대한 무기나 자금 지원, 우크라이나의 EU 조기 가입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혔기 때문"이라고 보도했다. 또 "머저르 대표가 우크라이나의 EU 가입 문제를 국민투표에 부치겠다고 약속했는데, 헝가리 사회에 만연한 반(反)우크라 정서를 고려할 때, 이는 사실상 가입 과정을 복잡하게 만들고 지연시킬 것"으로 내다봤다. 폴리티코는 "젤렌스키 대통령이 헝가리내 이같은 정서를 우선적으로 해소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우크라이나 정부는 헝가리의 정권 교체로 EU의 차관 문제는 거의 해결되었다고 여길 게 분명하다. 큰 짐을 내려놓은 키예프(키이우)는 앞으로 미-러-우크라 3자 평화 협상에서 러시아와 미국의 도네츠크주 철군 요구에 더욱 강경하게 반응할 게 확실시된다. 결국 우크라이나 전쟁은 조속한 종전보다는 장기화로, 러시아와 유럽 간의 갈등은 전쟁으로 비화할 위험도 그만큼 커진다.
올해 45세인 머저르 대표는 유럽의회 의원이다. 원래는 여당 피데스에 입당하면서 정계에 입문했다. 그 전에는 국제법 전문 변호사로 활동했다. 피데스당에 20년 이상 몸담으며 벨기에 브뤼셀 주재 외교관, 정부 기관 고위직 등을 역임했으나 당시 인지도는 그리 높지 않았다고 한다.
그의 운명을 바꾼 것은 2024년 논란이 불거진 국영 어린이집 아동 성범죄자 은폐·사면 사건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문을 앞두고 총 25명이 사면을 받았는데, 아동 성범죄 은폐로 유죄 판결을 받은 국영 어린이집 부원장이 포함돼 국민적 공분을 산 것. 이때 머저르 대표는 정부를 강하게 비판하며 피데르당을 탈퇴하고 티서당을 장악해 정치적 입지를 확보했다. 그리고 지난해 유럽의회 선거에서 30%를 득표하면서 오르반 정권의 16년 장기 집권을 무너뜨릴 유력한 다크호스로 떠올랐다.
이진희 기자 jhman4u@buyrussia21.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