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Apr 2026

러시아의 한반도 정책은 '경남안북(經南安北)'? 우크라 전쟁 4년이 만든 새 지형도

경중안미(經中安美, 경제는 중국, 안보는 미국). 중국에 대한 경제 의존도가 커지면서 미국과 중국 두 나라를 모두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우리가 고안해낸 '투 트랙'(이중) 전략이다. 이 구호는 냉전 종식후 (한국 전쟁으로) 피로 맺은 안보 동맹국인 미국과, 피를 흘린 적대국 중국 중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고 현실적 협력 관계를 유지해 나가는 데 필요한 이론적 받침이 됐다. 그 비중이 들어선 정권의 이념적 성향과 정책 방향에 따라 달라진 것은 말할 것도 없다. 

4년을 넘긴 러시아의 특수군사작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신(新)냉전체제가 구축되면서 러시아도 대(對)한반도 정책에서 비슷한 길을 걸어갈 작정인 듯하다. 우크라이나 접경 쿠르스크주(州) 전투에서 피로 맺은 군사 동맹국(북한)과 어떠한 상황에서도 무시할 수 없는 경제 파트너(한국)를 응대하는 편리한 방식이 아닐까 싶다. 경남안북(經南安北, 경제는 Южная Корея, 즉 사우스 코리아, 안보는 Северная Кореяю, 즉 노스 코리아)를 선택하는 투 트랙이 현실적이다.
전쟁 발발과 동시에 서방의 대러 제재에 동참한 한국은 러시아에게는 비우호국이다. 친(親)러, 반(反)러로 갈린 전세계적인 지형도 위에서 한-러 양국은 지난 4년여간 때로는 피할 수 없는 충돌의 길로, 때로는 러브 콜을 주고받는 사이로 달려가곤 했다.

최근 전개된 몇 가지 큰 흐름을 되짚어보면, 
#1
우크라이나에 무기를 제공하는 미국, 영국, 프랑스 등 나토(NATO) 주재 30개국 대사단이 14일 한국을 방문해 방산업체인 한화에어로스페이스와 한국 조선업을 대표하는 HD현대를 찾았다. 

#2 
마르크 뤼터 나토 사무총장은 15일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우크라이나방위연락그룹(UDCG) 회의(통칭 람슈타인 회의·독일 람슈타인 미군기지에서 첫 회의가 열렸다/편집자)에서 '우크라이나 전쟁을 잊지 말아달라'고 관심을 촉구했다.

#3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우리 나라도 참여하고 있는 람슈타인 회의가 끝난 뒤 "5개국이 PURL(Prioritized Ukraine Requirements List, 우크라이나 지원을 위한 나토의 미국산 무기 구매 프로그램)에 참여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한국을 지켜보는 러시아 안보 담당자의 눈길이 흔들릴 것만 같다. 걱정 아니면 적대감이다. 제 발이 저리기는 하겠지만, 북한으로부터 파병까지 받았으니, 한국이 나토를 도와 우크라이나에 군사적으로 직접적인 도움을 주지 않을까 러시아는 우려할 만하다.  

그 대응이 겉으로는 적대감을 띠고 터져나온다. 한반도 담당 러시아 고위 외교관의 입을 통해서다. 비록 간헐적이지만, 적시에 내밷는 경고성 발언은 '더 이상은 안된다'는 단호한 의지를 담았다. 안드레이 루덴코 러시아 외무차관은 지난달(3월) 28일 타스 통신 인터뷰에서 "우리는 우크라이나에 살상 무기를 직간접적으로 공급하는 데 한국이 참여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는 원칙적인 입장을 다양한 채널을 통해 (한국에) 일관되게 전달해 왔다"고 말했다. 우리나라가 우크라이나에 살상 무기를 제공할 경우, 보복 조치를 가하겠다는 기존 입장을 재확인한 것이다.

주목할 것은 나토가 주도하는 PURL을 통해 우크라이나를 지원하는 것도 보복 조치의 대상에 포함된다고 강조한 대목이다. 한-나토 간 관계 진전이 PURL 참여 선언으로 이어질 것으로 보고, "우리(러시아)가 그러한 단계(보복)까지 밟아야 하는 상황이 오지 않기를 바란다"고 루덴코 차관은 희망했다.

그는 유럽협력담당관(2007~2011년), OSCE(유럽 안보 협력 기구, Organization for Security and Co-operation in Europe) 주재 부대표(부대사, 2011~2016년)를 거쳐 CIS담당 제2국장에 올랐고, 2019년 한반도가 속한 아시아 담당 차관으로 승진했다. 중국어도 구사하는 정통 외교관이다.

그가 한국을 향해 직접 화법으로 보복 경고를 날린 것은 2024년 11월 쯤이다. 윤석열 당시 대통령이 (11월) 7일 기자회견에서 "지금까지는 인도주의·경제적 지원을 우크라이나에 제공했지만 북한군의 러시아 파병이라는 변수가 생기면서 상황이 달라졌다"며 우크라이나에 대한 무기 지원 가능성을 열어놓으면서다. 윤 대통령은 "(북한군이 러시아 쿠르스크 전투에서) 현대전 경험을 쌓게 되면 우리 안보에 치명적 문제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종전과 같은 인도주의 관점의 지원에서 이제는 북한군의 관여 정도에 따라서 단계별로 지원 방식을 바꿔 나가야 한다"면서 "무기 지원도 배제하지 않는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보름 뒤인 24일 루덴코 차관은 타스 통신 인터뷰에서 "러시아는 한국이 우크라이나에 살상 무기를 공급하면 강력히 대응하겠다"고 매섭게 경고했다. 그는 "우리는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대응할 것이고, 이것이 한국 자체의 안보를 강화하는 데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지난 2월에는 한-러 관계가 더욱 긴박해졌다. 나토가 우리 나라에 PURL 가입을 요청하고, 우리 외교부는 (2월) 20일 "나토와는 PURL을 포함해 다양한 지원 방안을 계속 협의하고 있다"라고 밝혔다. 무기 지원 가능성이 PURL 가입이라는 형식으로 구체성을 띠기 시작한 셈이니 러시아가 발끈하는 것은 당연하다.
마리야 자하로바 러시아 외무부 대변인은 이튿날(21일) 이에 대한 질문에 "한국의 PURL 참여 가능성 보도에 놀랐다"면서 "실제로 참여할 경우, 우리는 비대칭 조치를 포함해 보복 조처할 권리를 실행할 수밖에 없다"고 대답했다. 그녀는 "한국 당국자들이 우크라이나군에 무기와 탄약을 쏟아부으려는 서방의 집단 노력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반복적으로 말해 왔다"고 그간의 양국 관계를 되짚으며 "의심할 여지 없이 러시아와 한국의 관계에 돌이킬 수 없는 손상을 일으키고, 한반도에 대한 건설적 대화를 회복하는 전망을 파괴할 조치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아직까지 한-러 양국이 파국으로 가는 길은 일단 피한 모양새다. 15일 베를린에서 열린 '람슈타인 회의'에서 우리나라는 PURL 참여를 통보하지 않는 게 분명해졌다. 젤렌스키 대통령이 발표한 추가 참가 5개국 명단에 들어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러시아측이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PURL은 직역하면 '우크라이나 지원 우선 품목 목록(PURL·Prioritized Ukraine Requirements List)'이다. 실제로는 이를 수행하는 국제적인 우크라이나 지원 체계를 말한다. 트럼프 미 행정부의 출범 이후, 미국이 우크라이나에 대한 무상 무기 지원을 대폭 축소하자, 그 공백을 메우기 위해 나토가 지난해(2025년) 7월 도입한 대안 체제다. 우크라이나가 우선적으로 필요한 무기의 목록을 제출하면, PURL 가입국(주로 나토 회원국)이 자금을 분담해 미국산 무기를 구매한 뒤 우크라이나에 제공하는 방식으로 운영된다.
 

러시아군의 쿠르스크 탈환 작전에 참전한 파병 북한군의 영상. 위는 목표물을 점령한 뒤 러시아군 병사와 함께 손을 흔드는 장면이고, 아래는 점령 목표물에 러시아 삼색기와 나란히 게양된 북한 인공기/러시아 TV 채널 영상 캡처


미 트럼프 행정부는 유럽 주도의 PURL 시스템 도입을 자신들의 공적으로 여긴다. J.D. 밴스 미 대통령은 람슈타인 회의가 열린 15일 "워싱턴은 우크라이나에 제공할 무기 구매를 중단했으며, (그래서 PURL 체제가 출범했으니) 이는 현 행정부의 성과"라고 주장했다.

우리의 최대 안보 동맹국인 미국도 사실상 포기한 대(對)우크라 무기 지원을 위해 우리 나라가 뒤늦게 PURL 프로그램에 동참할 경우, 득실(得失)을 따져보자.

잃는 것(失)는 누가 봐도 분명하다. 한-러 관계에 치명적인 파장을 불러오고, 분쟁 당사국에 살상 무기를 제공하지 않는다는 기존 원칙이 무너진다. 신중해야 한다는 견해가 우세한 이유다. 

얻는 것(得)도 물론 있다. 한 국가(우크라이나)의 영토및 주권 보전을 최고 가치로 치는 서방 진영의 일원으로서 한국의 위상에 미칠 타격을 지우고, 급성장 중인 K방산의 유럽 시장 내 입지가 탄탄해질 수도 있다. 나토 회원국이 아닌 호주와 뉴질랜드, 그리고 일본마저 PURL 가입을 결정한 것이 우리에게는 압박 요인이다.

우크라이나와 나토, 유럽 등지에서 우리나라에게 가하는 PURL 동참 압력은 아직 그리 높지는 않아 보인다.
우크라이나 매체 스트라나.ua와 가제타루 등 러시아 언론에 따르면 젤렌스키 대통령은 15일 람슈타인 회의가 끝난 뒤 "5개국이 PURL을 통해 우크라이나의 무기 구매를 위한 자금 지원에 합의했다"고 발표했다. 리투아니아와 에스토니아, 벨기에, 네덜란드, 노르웨이다. 우크라이나 인접 유럽 국가들이 새로 동참하는 모양새다. 그마저도 젤렌스키 대통령에게는 기분 좋은 소식이다. 그 파장이 우리 나라에까지 미치기에는 두 나라 사이에 물리적으로 거리가 너무 떨어져 있다.

뤼터 나토 사무총장도 이날 람슈타인 회의에서 연설 시간을 회원국간 불공정 등 나토 내부 문제에 주로 할애했다. 그는 "나토 회원국 간 우크라이나 지원 비용 분담이 불공정하다"며 "앙카라에서 열릴 나토 정상회담을 앞두고, 너무 적은 국가가 너무 많은 부담을 지고 있는 문제를 우선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올해 말까지 방공망과 드론, 장거리 탄약(미사일)을 중심으로 600억 달러 상당의 군사 원조를 우크라이나에 제공할 계획이라며 회원국들의 협조를 요청했다. 또 PURL은 2026년에도 계속 운영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러시아가 '경남안북'(經南安北) 정책 의지를 뚜렷하게 내보인 것은 지난달(3월) 31일 루덴코 차관의 일간지 이즈베스티야와의 인터뷰에서다. 어쩌면 우리나라에게 경제 협력이라는 당근을 던져 15일 람슈타인 회의를 계기로 촉발될 수 있는 한-러 관계의 참사를 미리 막는 의도를 가졌을 지도 모른다.

그는 이란의 호르무즈 해협 봉쇄로 최대 현안으로 떠오른 아시아권에 대한 러시아산 석유 공급과 무역 확대, 쇄빙선 건조 등에 대해 정책 기조를 설명하면서 "러시아 복귀를 희망하는 한국 기업들에 대한 러시아측 입장을 묻는 질문에 "러시아는 원칙적으로 한국 기업들의 러시아 복귀 의사를 환영한다"고 답변했다. 그는 "한국의 현 행정부 관계자들은 '우호적인 지정학적 상황이 조성된다면' 모스크바와의 정치적 대화 및 무역·경제 협력을 복원하겠다는 의지를 구두로 표명하고 있다"면서 "그러나 그들은 구체적으로 실질적 조치를 취하는 것을 자제하고 있는데, 이는 우크라이나 사태(전쟁)의 해결(종식)과 러시아와 미국 간의 대화 진전을 기대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적절한 시기가 되면 모든 관련 상황을 고려하여 조치를 취할 것"이라며 "우리의 최우선 관심사는 러시아 시장과 국내 소비자의 이익을 보호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가 사흘전(28일) 타스 통신 인터뷰에서 한국을 향해 살상무기 지원을 경고한 것과는 완전히 다른 어감이다. 타스 통신을 통해서는 채찍을, 이즈베스티야를 통해서는 당근을 던지는 투 트랙 전략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그 전에도 푸틴 대통령을 비롯해 일부 러시아 인사들이 한-러 양국 간의 관계 개선을 바라는 목소리를 내곤했다. 서방과 러시아 사이에 낀 우리나라의 처지를 이해한다는 태도로, 양국 관계의 미래에 대한 희망을 피력하기도 했다. 

사실 한-러 관계가 이전과 완전히 다른 관계로 들어간 것은 러시아 측의 책임으로 봐야 한다. 특수군사작전을 개시하고, 한국을 비우호국으로 지정한 것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가장 큰 문제는 북한과의 군사 동맹 강화다. 그리고 뒤이은 북한군의 쿠르스크 전투 파병이다.

푸틴 대통령은 2024년 6월 18∼19일 평양을 방문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양국간 포괄적인 전략적 동반자 관계 조약을 체결했다. 이후 한-러 양국 간에 서로를 향한 발언이 거칠어지고, 신경이 예민해진 것은 외교 관례상 당연한 흐름이다. 

언론을 통해 드러난 러시아 측 발언만 보더라도, 루덴코 차관이 푸틴 대통령의 방북 직후인 (6월) 26일 "이도훈 (당시) 주러 대사와 만나 한국 당국에 한반도의 긴장 고조를 촉발하는 대결적인 정책을 재검토하고 동북아시아에서 평화와 안정, 화해를 달성하는 효과적인 방법을 모색하는 길을 택하기를 촉구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수십년간 쌓아온 건설적 협력의 산물이 파괴된 것은 한국의 현재 지도부 탓이라고 주장했다. 한마디로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자하로바 외무부 대변인도 앞서 러-북한의 포괄적인 전략적 동반자 관계 조약 체결과 관련, "양자 협력에 대한 한국 정부 고위 인사들의 '반러시아적 발언'을 허용할 수 없다"고 밝혔다. 특히 한국 대통령실이 우크라이나에 대한 살상무기 지원 문제를 재검토할 수 있다고 발표한 데 대해 "한국이 우크라이나에 살상무기를 제공한다면 한-러관계가 치명적인 결과를 맞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거친 외교 안보적 언사 못지 않게 한-러 간 경제협력 관계도 오랜 동면(冬眠)에 들어가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후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등 한국의 주요 대기업들은 러시아 시장을 떠났다. 하지만, 러시아 시장에 대한 기대치는 여전하다. 현지에 최소한의 인력으로 사무실을 유지하며 러시아 시장이 동면에서 깨어나기를 기다리고 있다.  

러시아도 한국 기업들의 이같은 기대치를 꿰뚫어보고 있다. 동시에 자국 시장에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것은 유럽 브랜드보다 한국 브랜드라는 사실도 잘 알고 있다. 러시아가 '경남안북'의 투 트랙 전략을 계속 유지한다면 선택은 우리의 몫이다. 최근 러시아산 나프타의 긴급 통관에서 보듯, 제한적이지만 실물 차원의 접점을 찾아야 할 필요가 있다. 서방의 대러 ‘제재 공조’와 우리의 ‘에너지 안보’ 사이에서 현실적 선택이 눈앞에 와 있다. 러시아의 '경남안북' 전략이 그나마 우리에게는 다행인지 모른다.
이진희 기자 jhman4u@buyrussia21.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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