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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위 '디지털 시대'에 화폐 가치를 대신하거나 투자 대상으로 떠오른 새로운 통화를 확보, 교환, 저장하는 과정에서 접하는 낯설은 단어들이다. 어쩌면 같은 표현을 전문가들이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조금씩 의미를 바꿔가며 사용하다 보니 보통 사람들을 더욱 헷갈리게 하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통상 '돈'이라고 말하는 화폐, 혹은 (금융권 용어로) 통화는 3가지 기능을 갖고 있다. 물건을 사고 팔 때 사용되는 ‘교환 기능'과 가치를 증식하는 '투자 기능’, 그리고 가격을 비교·계산하는 가장 기본적인 역할인 ‘단위 기능’이다.
우리가 지폐나 동전을 지갑에 넣고 다니는 것은 화폐의 '교환' 기능을 이용하기 위해서이고, 은행 등 금융권에 넣으면 '투자' 기능을 극대화하는 행위다. 20세기 중반, 은행의 신용을 바탕으로 등장한 '신용카드'는 일상 생활의 편의성을 높이는 '교환' 기능만 갖고 있지만, 제 2의 화폐로 불렸다.
디지털 시대, 특히 블록체인 기술의 발달과 함께 등장한 제 3의 화폐는 바로 '디지털 화폐(통화)'다. 지폐나 동전, 신용카드 처럼 실물이 존재하는 게 아니라 디지털(전자, 온라인) 시스템 속에 존재하는 '가상의 돈'이다. 그래서 가상화폐 또는 (암호만으로 움직인다고 해서) 암호화폐로 불린다. 대표적인 게 '투자 기능'만으로 전세계의 재테크 시장을 뒤흔든 비트코인이다. 비트코인의 엄청난 인기에 힘입어 통칭 '코인'으로 불리는 암호화폐들이 이미 도저히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등장했다. 이더리움, 솔(SOL), BNB, 폴리곤(POL)..

암호화폐 투자의 대장주 격인 비트코인(위)와 이더리움 이미지/얀덱스 캡처
스마트폰의 확산과 함께 입증된 암호화폐의 효용성과 편의성, 안전성은 국가 단위의 통화당국(중앙은행)도 암호화폐의 제도권 진입(정식 통화)을 고민하게 만들었다. 각국 중앙은행이 입법화에 앞장섰고, 러시아 등 일부 국가들은 시범 사업을 끝내고 정식 도입을 눈앞에 두고 있다. 스테이블코인(달러·유로와 같은 법정화폐나 금 등 자산의 가치에 연동된 암호화폐)와 디지털 루블(루블화에 연동된 스테이블코인)이라는 용어는 그렇게 나왔다. 러시아의 암호화폐 정책과 도입 단계, 현상 등을 두루 살핀다/편집자
러시아 중앙은행은 '디지털 루블'에 대한 시범 사업을 끝내고 오는 9월 1일 출시를 앞두고 있다. 러시아인들은 아직 디지털 화폐(CBDC), 즉 디지털 루블에 대한 인식이 낮고, 대체로 사용에도 소극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후 서방의 대(對)러 금융 제재로 대외 결제에 곤란을 겪고 있는 러시아 기업들에게는 스테이블코인은 이미 제재를 우회할 수 있는 수단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우크라이나 매체 스트라나.ua와 rbc 등 러시아 언론에 따르면 영국 파이낸셜 타임스(FT)는 지난 2월 5일 "서방의 금융 제재를 받는 러시아가 '모노폴리 게임'(미국 파커 브라더스사가 개발하고 세계적으로 유명한 보드게임/편집자)과 유사한 결제 방식을 개발한 결제 대행업체 A7를 통해 해외 이체를 시도하고 있다"며 "그 규모가 1,000억 달러 규모에 이른다"고 보도했다.
FT에 따르면 A7은 "지난해 12월 기준 러시아 전체 대외 무역 거래의 19%를 처리했다"고 주장했다. 전문가들은 이에 대해 "이체 규모를 검증하기는 어렵지만, 사실인 듯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A7의 자금 이체 방식은 바로 러시아 루블화에 고정된 스테이블코인인 A7A5 토큰(코인)을 이용하는 것. 여기에 모노폴리 게임에 쓰이는 화려한 카드(돈)를 닮은 A7 약속어음이 함께 사용되는데, FT가 모노폴리 보드 게임과 유사하다고 지적한 이유다.
금을 담보로 하는 A7 약속어음에는 위조를 방지하기 위한 특별한 장치와 인증을 위한 QR 코드가 새겨져 있다. 최대 5천 달러까지 가능한 A7 어음의 소지자는 러시아 내 A7 사무소에서는 루블화로, 해외에서는 달러 등 외화로 교환할 수 있다. 러시아인이 5천달러짜리 A7 어음 2장을 갖고 해외에 나가면 현지에서 1만 달러로 바꿔 쓸 수 있다는 뜻이다. A7측은 해외에서 어음 소지자가 QR 코드를 텔레그램 봇으로 전송하면, 담당자가 현금을 가지고 방문한다고 밝혔다. 러시아 여행객들이 자주 찾는 아랍에미리트(UAE)의 두바이에서는 디르함으로, 튀르키예(터키) 이스탄불에서는 달러로 제공된다고 한다.
기업간 결제의 경우, A7 플랫폼은 블록체인상에서 신원을 확인하고 가상자산(A7A5)으로 대금을 청구하거나 지급할 수 있는 경로를 제공한다. 특히 패러럴 네트워크(Parallel Network)와 같은 레이어2(Layer 2) 기술을 바탕으로 거래의 익명성을 강화하고, 수천 건의 결제를 동시에 처리할 수 있다고 한다.
금융 거래 분석 전문 엘립틱(Elliptic)사는 FT측에 "2,300장의 약속어음이 A7A5를 통해 교환되면서 총 860만 달러 규모의 이체 거래가 성사된 것으로 보인다"고 추정했다. 또 온라인으로 4만1,300개 지갑 사이에 25만 건의 거래가 이뤄진 것으로 알려졌다.
A7 국제 결제 플랫폼은 지난 2024년 말 처음 등장했다. 몰도바 올리가르히(재벌) 일란 쇼르가 러시아 국영 방위산업 은행인 '프롬스비아즈방크'(PSB)와 함께 결제 플랫폼을 만들고, 운영업체인 A7-Agent의 CEO로 앉았다. A7 플랫폼은 현재 미국 달러화를 비롯, 유로화, 위안화, UAE 디르함화를 취급하며 향후 다른 통화로 확대할 계획이다. 결제 수수료는 0.3%.
공동 소유주인 PSB에 따르면, A7을 통한 거래량은 2025년 상반기에 7조 5천억 루블(980억 달러)을 넘어섰다.
A7의 거점 확대도 진행중이다. 러시아 곳곳에 A7 사무소를 설치하고, 남미와 아프리카 대륙으로 진출할 구상도 밝혔다.
러시아에서 A7플랫폼이 유용한 것은, 서방이 대(對)러 금융 제재의 일환으로 러시아를 국제간 달러화 송금 시스템인 스위프트(SWIFT)에서 축출했기 때문이다. 러시아 기업들은 졸지에 석유·가스 수출 대금을 받는 창구가 막혔고, 수입 물품의 대금을 지급한 금융 거래 방법도 사라졌다. A7은 이들 기업들이 제도권 금융기관을 이용할 필요가 없이, 암호화폐의 거래 방식를 통해 국제 파트너와 자금을 주고받는 결제 행위를 중재한다고 보면 된다. FT는 "A7측이 스위프트(SWIFT) 시스템은 사용하지 않는다"면서 "그러나 구체적인 방법은 알려주지 않았다"고 밝혔다.
러시아 정부도 직간접적으로 A7플랫폼을 지원하고 있다. 러시아 재무부는 지난해(2025년) 11월 (A7 플랫폼의 공동 소유자인) A7-Agent, PSB와 민관 합작 회사 '로스벡셀'(Росвексель)을 설립하기로 했다. 당시 재무부 측은 "새 조직을 국가와 기업이 국제 결제 인프라 발전을 위해 협력하는 모범적인 사례"라고 주장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A7 플랫폼의 운영 기반이 되는 암호화폐 A7A5가 러시아에서 처음으로 디지털 화폐를 인정받았다는 사실이다. rbc에 따르면 러시아 중앙은행은 지난해(2025년) 5월외국 디지털 권리(FDR, 디지털 자산)의 러시아 진입 기준을 마련, 발표했다. 스테이블코인을 포함한 특정 암호화폐가 일정한 조건을 충족하는 경우, 디지털 금융 자산으로 인정하기로 한 것이다. 이 기준에 따라 루블화 표시 A7A5가 그해 9월 디지털 금융 자산(디지털 화폐)으로 처음 인정받았다. 러시아 중앙은행은 또 해외 거래에서 A7A5의 사용을 합법화했다. 러시아인들은 이제 합법적으로 A7 사무소에서 현금(루블화)으로 A7A5 토큰(코인), 또는 A7 어음을 살 수 있게 됐다.
A7A5의 합법화는 암호화폐 도입에 부정적이었던 러시아 중앙은행의 입장에서 보면 이례적이다. 러시아 중앙은행은 A7A5와 같은 민간 디지털 화폐가 아니라, '디지털 루블'과 같이 직접 통제 가능한 스테이블코인의 도입을 추진해 왔기 때문이다. 게다가 푸틴 대통령은 블라디보스토크 A7 사무소 개소식에 화상으로 참석하기도 했다.
EU는 "A7 플랫폼이 모스크바와 수많은 연관성을 갖고 있다"고 판단해 2025년 7월 A7을 제재 대상에 올렸고, 다음달(8월)에는 미국이 A7에 대한 제재에 동참했다.
A7 플랫폼이 등장하기 전, 러시아에서는 서방의 제재를 회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암호화폐 사용의 필요성을 인정하면서도 그 방법론에서는 재무부와 중앙은행 간에 견해가 엇갈렸다. 재무부는 급한 대로 기업들이 대외 결제에 비트코인을 사용하기도 허용하는 방안을, 중앙은행은 정식으로 디지털 통화, 즉 스테이블코인을 도입하는 방안을 선호한 것으로 전해졌다.
로이터 통신에 따르면 안톤 실루아노프 러시아 재무장관은 2024년 12월 러시아24 TV 채널에서 "러시아에서 채굴된 비트코인을 (무역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며 "이런 거래가 더욱 확장되고 발전돼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중국과 튀르키예(터키) 등 러시아의 주요 무역 상대국 은행들이 미국의 2차 제재 조치(러시아와 거래하는 제3자에 대한 미국의 추가 제재)에 러시아 금융권과의 이체 거래를 중단하는 등 몸을 사리자, 러시아 정부로서는 이에 대한 대책이 다급했다. 기업들도 대외 결제 문제에 대해 반복적으로 불만을 토로했다. 러시아 정부가 서둘러 비트코인 등 암호화폐들을 3년간 한시적으로 국제 무역 결제에 사용하는 것을 허용하고, 비트코인 채굴도 합법화한 이유다.
문제는 비트코인과 같은 암호화폐는 시장에서 가치의 변동성이 높다는 것. 장기적으로, 또 안정적으로 대외 결제에 활용하기에는 위험이 너무 크다. 러시아 중앙은행이 스테이블코인의 도입을 선호하는 것은 이론적으로 아주 당연하다.
가제타 루 등 러시아 언론에 따르면 알렉세이 구즈노프 러시아 중앙은행 부총재는 2024년 7월 국제 결제를 위해 스테이블코인을 합법화할 계획을 밝혔다. 그는 국가 간 자금 이체를 위해 스테이블코인의 사용을 허용할 뿐만 아니라, 그러한 자산을 러시아로 이전해 사용하고 보관할 수 있도록 할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스테이블코인은 달러에 연동돼 국제적으로 유통되는 테더(USDT), 써클(USDC)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몰도바 출신 올리가르히(재벌) 일란 쇼르가 재빨리 PSB와 함께 A7 결제 플랫폼을 만들고, 스테이블코인 A7A5를 창안해 러시아 정부의 인정을 받아냈다. 러시아로서는 자칫하면 테더(USDT), 써클(USDC)로 주도권을 넘겨줄 뻔한 상황을 A7 결제 시스템 덕분에 피한 셈이다.
서방 진영도 러시아가 암호화폐를 이용해 제재를 회피하려는 갖가지 시도를 이미 꿰뚫어 보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은 2024년 4월 "러시아가 해외에서 군수및 민수용 이중용도의 물품 구매 시 서방의 제재를 피하기 위해 암호화폐를 사용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나섰다. 루블화가 스테이블코인인 테더(USDT)로 전환되고, 현지 중개인은 현지에서 이를 외화로 바꿔 공급업체에 대금으로 지불한다는 것. WSJ은 "이같은 거래는 월 100억 달러로 추산된다"며 "중국과 중동 지역에서 주로 이뤄진다"고 전했다. 이에 미국 재무부도 테더와 같은 스테이블코인의 러시아와의 거래를 차단할 수 있도록 의회에 입법화를 요청하기도 했다. 벌써 2년 전의 이야기다.
러시아 기업들은 대러 금융제재가 지속되는 한, 가상자산의 결제 비중을 지속적으로 늘려 SWIFT 배제로 처한 국제적 금융 거래의 고립 탈피에 나설 것이다. 그 과정에서 A7 플랫폼의 역할과 러시아의 첫 스테이블코인 A7A5의 성장 여부도 관심을 끌 전망이다. 가상자산은 이제 국가 경제 안보와 직결된 핵심 금융 인프라로서 그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이진희 기자 jhman4u@buyrussia21.com